1994년 발생한 르완다 사태. 후투족과 투치족의 반목이 빚은 내전으로 약 100일 동안 100만 명이 숨졌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르완다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당시의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호텔 르완다’는 내전 당시 1,268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실존 인물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살육전에 무관심했던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투치족과의 평화협정에 동의하면서 르완다에 화해 분위기가 형성된다. 르완다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는 평화협정 이후 외교관들과 외신 기자들이 호텔에 몰려들자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는 하루 빨리 협정 이행으로 르완다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암살되고 르완다가 혼란에 빠지자, 후투족 자치군은 투치족에 대한 폭행과 살육을 일삼고 투치족에 온건한 태도를 보인 동족에게까지 칼날을 들이댄다. 투치족 아내를 둔 폴은 가족과 친구들을 데리고 호텔로 피신하고, 오갈 데 없는 피난민들이 유엔 평화유지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호텔로 몰려든다. 내전이 격화해 유엔과 외신 기자들마저 탈출하자 폴은 난민들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영화는 민족 학살을 다루고 있지만 카메라는 대량 살육 장면을 부각시켜 공포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평범한 사람이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에 시선을 맞춘다. 주인공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모습은 난세의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유력 인사들과 자치군 사령관을 뇌물로 매수하는 폴의 행위는 비굴하기까지 하지만 그런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영화가 말하는 제3세계에 대한 서방 세계의 냉담함과 국제기구의 무력함은 처참했던 르완다의 1994년 만큼이나 각박한 국제정치의 현주소다. 민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은 남다를 것이다. 테리 조지 감독, 7일 개봉, 12세.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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