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리 내부 정책을 문제삼아 판을 엎었다." 한미FTA 제2차 공식협상 도중 의약품협상이 결렬되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외쳤다. 이어 복지부 관계자들은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맞서 배수진을 쳤다"면서 "우리는 국익을 사수하겠다"고 비장한 심경을 드러냈다.
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약제개편안의 핵심인 '의약품 건강보험 선별등재 방식(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ㆍPLS)'을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함으로써 '정책 주권'을 확보하겠다는 독립선언 같은 발언이었다.
결국 복지부는 PLS 약제개편안을 입법예고했다. 이른바 4대 선결조건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관철해 'FTA에서의 자주 정책'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진행과정과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만 여길 순 없어 보인다. 명분을 획득하며 한껏 기분은 냈는데 실리와 국익 차원에서 보면 뒷문이 열려 있다.
● '자주 정책'이라는 장담의 허실
미국이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양 PLS를 쉬 용인한 대목이 수상쩍다. 미국은 FTA협상이 공식 시작되기 한 달 전 복지부가 PLS 약제비적정화 방안을 발표(5ㆍ3선언)하자 크게 반발했다. 협상에서 최대 현안으로 부각시켰고, '테이블을 차며' 결렬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닷새 후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유 장관을 방문했다.
이 자리서 미 대사는 유 장관에 항의하고 PLS 포기를 고집하는 대신 한국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 주일 후 복지부는 미국으로부터 PLS에 대한 '항복'을 받아냈음을 설명하며 약제개혁안을 입법예고했다.
"효능과 경제성을 평가해 약값을 결정하는 '약제급여조정위원회(약급위)'에 미국 제약업계 관계자를 참여시킬 생각이다." 이후 복지부 간부의 이러한 공개발언이 이어지고, "미국 신약에 대해 특허기간의 연장ㆍ확대도 검토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PLS를 지켜냈다는 명분을 먼저 주면서, 예상되는 장기적 실익을 챙길 수 있는 담보를 확보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준다니 반대하던 원숭이들이 우선 4개를 주고 나중에 3개를 준다니 좋아했다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조금 비약한다면 '자주적 약제개혁-PLS 획득-미국 대형제약회사'란 연상이 '자주 국방-전시작전권 회수-미국 군수산업'과 오버랩 되면서 앞으로 자주를 외치지만 뒤에선 실리를 내주는 참여정부의 허실이 또 생각난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도입된 포괄주의 방식(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ㆍNLS)보다 PLS가 약제비 적정화와 건보적자 해소 등을 위해 장기적으로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본다.
NLS는 일본 영국 독일에서, PLS는 나머지 24개 OECD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국내 제약회사들이 대외 경쟁력 미비, 의약품 비용ㆍ효능 선별을 위한 인프라 부족, 국민 의료혜택 감소 등의 이유를 내세워 이에 반대하는 것은 군색해 보인다.
제약업계는 대부분이 신약개발에 소홀한 채 NLS에 안주, 일반약이나 복제약 생산에 열중했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전혀 상반된 이유로, 미국의 제약회사들과 똑같이 PLS 도입을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볼썽사납다는 말을 듣지 않겠는가.
● 聲東擊西 전략에 대응책 세워야
6일 미국 시카고에서 한미FTA 제3차 협상이 시작된다. 주된 의제는 당연히 'PLS 이후'가 될 것이고, 미국은 참여정부가 '명운을 건 배수진'을 양보했다고 생색낼 것이다.
약급위 참여로 PLS 선정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신약 시장확충과 가격보장 등의 급부를 강력히 요청해 올 것이 뻔하다. '성동(聲東)'이 마무리 됐으니 '격서(擊西)'에 들어가는 건 전략의 기본이다. 국가대계를 위해 PLS를 관철시킨다는 유 장관의 말이 박제로 남아선 안 된다.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었으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고, 그 결과 자주정책이 사수한 국익은 무엇인지, 최소한 11월 약제개혁안이 시행되기 전엔 소상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은커녕 업계의 반발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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