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전임 의장만은 못할지 몰라도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의 한마디에 월 스트리트가 요동을 치고, 동시에 지구 반대편 한국 증시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 오늘날 통합된 세계 경제의 현실이다.
그런 버냉키가 지난 주 세계화의 역풍(逆風)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는 와이오밍주 잭슨홀의 휴양지에서 열린 FRB 연례 심포지엄에 참석해 "세계경제 통합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반감이 커지고 있다"면서 "각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세계경제 통합에 따른 이익이 충분히 골고루 나눠지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발언 내용이 새롭다기보다 세계화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는 미국의 최고 경제정책 결정자의 말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의 발언은 물론 세계화와 경제통합이 "각국에 이익을 가져다주고 생산성을 향상시켜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전제 아래 나온 것이어서 세계화 반대론자들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에 주목하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서 그와 같은 성찰적 태도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구체적 방편으로 추진되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우도 찬성론자들은 개방의 긍정적 효과만을 강조하면서 반대론을 일축하려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FTA가 계층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진국의 실증적 사례를 편리한대로 인용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 경제가 개방을 통해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 효과가 클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개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사람들의 항변을 외면하는 한 생산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개방의 장점과 당위성을 홍보하기에 앞서 취약 계층과 부문에 대한 대책을 먼저 내놓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게임법칙을 세계화 시대의 불가피한 생존법칙으로 호도하고, 게임에서 탈락한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논리가 득세하는 사회에서 과연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양극화와 고용불안, 취업난 등의 문제를 어느 것 하나 효과적으로 풀지 못한 현 정부가 FTA대책인들 제대로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세계화 바람이 몰아치던 2000년 무렵 국내 서점가에선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이 한동안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다. 저자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 책에서 승자독식의 사회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세계는 본질적으로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기술과 시장 그리고 정보통신수단에 의해 세계는 갈수록 더 빈틈없이 긴밀하게 짜여져 가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더 넓고 멀리 나뉘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리드먼의 통찰은 버냉키의 우려와 통한다. 버냉키는 "보호무역주의와 국제적 긴장, 테러위험 증가가 세계화의 진전을 억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화의 반대편에서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고, 국제적 긴장과 테러위험이 높아지는 배경에 계층간, 국가간 빈부격차가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김상철 경제부 차장대우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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