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노 리포트 / 수전 조지 지음ㆍ이대훈 옮김 / 당대 발행ㆍ1만3,000원
새 천년의 시작을 앞둔 1997년 11월 스위스의 휴양도시 루가노에 세계적 석학 아홉 명이 모였다. 정체가 불분명한 ‘위임위원회’로 세계경제와 자유시장체제의 위협 요소를 찾아내고 그 대안을 제시하라는 극비 주문을 받고 1년간 작업한 결과를 보고서로 내기 위해서 였다. 도시 이름을 딴 ‘루가노 리포트’는 21세기에도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담은 보고서이다.
리포트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할 그 어떤 체제도 없다는 점을 우선 인정한다. 마르크스주의나 종교적 신념에서 기인하는 위협들도 말썽거리 정도로 치부할 정도다. 그렇다면 그냥 놔두기만 해도 자유시장체제는 잘 굴러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애당초 이 같은 극비 주문도 없었고 리포트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전망한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세계경제 규모가 지구 생태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 유지의 역량을 압박하고, 무분별한 성장이 이제는 반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극단적인 양극화에서 비롯된 ‘패자’의 양산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고, 규제 철폐에서 비롯된 마약밀매 무기밀수 돈세탁 등이 합법적 경제활동의 근간을 무너뜨리며,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해 1930년대처럼 시장체제가 한순간에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반면 유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는 이런 골칫거리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결국 리포트는 세계경제가 총체적 관리 부재 상태에 빠져있고 생태적 파국에 직면해 있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리포트는 한가지 등식을 내놓는다. ‘(지구에 대한)충격=소비 X 테크놀로지 X 인구’. 소비, 테크놀로지, 인구라는 이 세 요소는 부와 빈곤, 경제발전 수준, 건강, 교육, 출산, 여성의 지위 등과 같은 변수를 반영하기 때문에 각각의 변수를 정확하게 해석하면 사회ㆍ경제적 예측 또한 훨씬 쉬워진다.
보고서가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하는 요소는 인구다. 소비 증가를 막기가 어렵고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지구에 미칠 충격을 줄여줄 가능성도 적어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고서는 ‘최대 다수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로 인구 감소를 제시한다. 그 길만이 빈곤에 허덕이지 않고 지구가 생명을 유지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생각하는 적정 인구는 40억명. 1975년의 세계 인구인데 당시는 후진국이 소득 증가를 경험했고 환경도 파괴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인구가 60억명이고 2020년이면 80억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떻게 40억명으로 줄일 수 있을까.
리포트는 “축소 인구의 90%를 후진국권에서 달성해야 하고 사망률은 높이고 출생률은 낮추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열을 조성하고 제3세계의 무기거래를 활성화하며 곡물가격을 높이고 유전자 조작 작물을 남반구에 방출하며 위생ㆍ의료 서비스를 민영화하고 기부금을 차단하며 결핵 말라리아 혹은 에이즈를 방치하는 것 등 구체적 방법도 제시한다.
물론 이 같은 섬뜩한 내용의 ‘루가노 리포트’나, 위임위원회, 또 그것을 작성한 특별연구팀은 모두 가상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국 출신 반세계화 전문가 수전 조지가,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계속 이어진다면, 세계시장주의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경고문이다. 보고서 대로 해서 얻은 ‘최대 다수의 행복과 복지’도 결국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그리고 신자유주의 수혜자의 것일 수 밖에 없다. 보고서는 허구지만 사용된 통계는 모두 사실이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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