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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프리가 만난 사람 - 국내 유일 LP 제작자 손병문씨 "아날로그 추억을 복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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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프리가 만난 사람 - 국내 유일 LP 제작자 손병문씨 "아날로그 추억을 복원합니다"

입력
2006.08.2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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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전설적인 음반 두 가지가 동시에 LP로 재발매 된다. 음반 애호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그의 데뷔음반 ‘히키신 기타 멜로디(1958년 녹음)’와 1964년 국내 최초의 록 그룹 앨범으로 발표된 ‘에드훠’의 첫 앨범 ‘비속의 여인’이다. 신중현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무명에 불과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음악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기 때문. 그래서 그가 록의 대부로 재평가를 얻어내기까지 40여 년 동안 이 음반들은 ‘저주받은 걸작’으로 숨을 죽여야 했다. 신중현씨는 지난 7월 은퇴 선언 후 인천 송도공연을 시작으로 음악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국 순회공연 중이다. 그래서 은퇴 시점에 이루어진 그의 데뷔음반 재발매소식은 뜻 깊어 보인다.

이 의미 있는 작업의 주인공은 30대의 젊은 음악마니아 손병문씨(36ㆍ인디레이블 리듬온 대표). 손씨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아날로그 가요 LP음반 제작자이다. 그는 지난 해 12월부터 본격 작업에 들어가 최근 재킷 디자인 복원과 브클릿 인쇄를 마쳤다. 서교동의 5평 남짓한 디자인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무엇보다 원본 LP를 구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음반을 구하는 데만 4년 넘게 걸렸다. 오랜 수소문 끝에 결국 찾아냈지만 음반 재킷의 훼손상태가 심해 이를 복원하는 데에만 또 6개월이 걸렸다. 다행히 음반은 튀는 곳이 없어 한 달간의 리마스터링 작업으로 완벽하게 복원을 했다.”

그가 신중현씨의 데뷔 시절 음반의 LP복원을 꿈꾼 것은 5년 전. “신중현 선생님 본인도 이 음반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꼭 음반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이 작업은 그 자체로 대중가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세상은 온통 디지털시대가 아니던가? 왜 손쉬운 CD가 아닌 수용층이 제한적인 LP를 굳이 제작하려하는지 궁금했다. “온통 디지털 세상이기에 역으로 자연스럽고 따뜻한 아날로그 LP 소리의 맛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디지털 소리보다 인간미 넘치는 아날로그의 추억과 감동을 알기에 더욱 집착했다.”

손씨는 23살이던 1993년부터 10년간 경북 영주시에서 레코드샵 ‘음악세계’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음이 풍부한 LP에 특히 애정을 가졌다. 그 시절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신중현의 록 음악에 매료되었다. 희귀 음반들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도록 LP로 제작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문제의 IMF가 터졌다. 1년이 지나자 대목 때에도 음반이 팔리지 않았다. 인터넷 업체들 때문에 지방 도시의 레코드 가게들이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았다. 결국 그도 2003년 7월에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일을 결심하고 연고도 없이 단신 상경을 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기 시작한 복고문화와 함께 LP에 대한 관심도 부활했다. 오아시스레코드에 찾아가 손진석 사장에게 LP 이야기했다. 특이한 발상이라며 좋게 평가해준 손사장은 “나는 장사꾼처럼 보이는 사람은 싫다. 당신의 음악적인 열정과 촌사람 같은 편한 심성이 마음에 드니 특별히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첫 LP 작품으로 록그룹 ‘히6’의 4집을 제작했다. 좋은 조건에서 손쉽게 제작해 유럽과 미국에 200장 정도 수출까지 했다. 자신감이 생기자 두 번째로 여성 포크 듀엣‘현경과 영애’의 LP를 시작했다. 이번엔 모든 걸 직접 제작했다. 쉽지 않았다. 좋은 음원을 위해 80여 회를 반복해 듣고 공장에서 야식을 먹어가며 밤 세워 수작업을 강행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수작업이 힘들었다. 제품이 나오자 포크마니아들이 환영했다. 이에 CD도 제작했다. 20대 젊은 층에서 ‘좋은 음반’ 이란 평가가 나오자 가슴이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준 록그룹 마그마의 유일한 독집 LP작업은 잊을 수가 없다. 이 음반은 오리지널 마스터가 없어 시완 등 많은 음반사들이 제작을 포기했던 음반. 하지만 어느 음반사의 지하창고에서 수북한 먼지 속에 쌓여있는 수백 개의 마스터 박스와 씨름한 끝에 찾아냈다. 희열이 느껴졌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기침을 참을 수 없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즈음 국내 유일의 LP 제작공장을 가진 서라벌레코드가 기계노후와 수지타산 문제로 문을 닫았다. 이때부터 제작단가가 폭등해 대부분 LP제작자들이 떠났다. 그 역시 미국 제작을 해야 했기에 휘청거렸다. 차기작인 ‘무당’은 LP를 포기하고 LP형태의 재킷으로 CD제작을 했다.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자 다시 용기를 얻어 포크가수 양병집과 윤연선의 데뷔 LP를 연이어 발매했다.

힘든 작업에 비해 생활도 벅찬 수입이 고작이었다. 불쑥불쑥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간의 노하우가 아까웠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며 ‘승부’를 걸었다. 신중현의 데뷔 앨범 복원 작업이었다.

신중현씨의 스튜디오인 우드스탁으로 찾아갔다. “선생님 작품 중에 가장 먼저 나왔어야 할 작품이다. 순서는 잘못됐지만 소량 한정판으로 가치를 높여 제작하겠다.”고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 갖은 고생 끝에 지인을 통해 입수한 음반은 재킷은 낡았지만 다행히 음반은 복원이 가능한 양호한 상태였다. 이때부터 직접 포토샵을 배워가며 8개월간 몇 백번의 재작업을 거듭했다. 지난 7월, 그는 재킷 복원을 마쳤다. 음반은 300장 한정본 박스로 제작 중이고 칼라 음반이 될 것 같다. ‘에드훠’는 노란색이고 ‘히키신’은 아직 고심 중이다. 그리고 당시의 모습을 담은 2장의 대형포스터와 원본 사진을 담은 12페이지 해설 브클릿과 신중현의 록 계보도 등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다.

“주위에서는 유일하게 아날로그 LP작업을 하는 부분에 대해 디지털시대에 박수를 받을 일이라고 격려를 해준다. 그래서 아직 결혼도 못했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보람된 작업이기에 묵묵하게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음반 팬들이 열악한 제작여건을 좀 이해해 주신다면 더욱 힘을 낼 것 같다.”

8장의 복각LP를 제작한 그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고집스레 아날로그 소리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갈 길은 분명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가치가 있는 음반이라면 국악, 가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하게 LP로 제작해보고 싶다”며 자신에 찬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는 내친김에 2장으로 구성된 배호의 미공개음원 LP작업도 병행했다. 이 음원들은 아세아레코드에 보관된 오리지널 마스터로 미공개 곡 등 20곡을 수록했다. 대중음악사의 중요 아티스트인 신중현과 배호의 진귀한 LP들은 9월 중순이면 세상의 빛을 볼 예정이다.

글ㆍ사진=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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