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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의 작가 박영한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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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의 작가 박영한씨 별세

입력
2006.08.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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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 연작의 작가 박영한씨가 23일 오후6시30분 경기 일산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59세.

그는 3년 넘게 위암과 싸웠고, 최근 병세가 악화해 입원했다. 그는 사흘 전 가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이 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숨을 놓았다고 한다.

그는 ‘우묵배미’의 작가였다. 1970ㆍ80년대 산업화, 도시화의 거친 힘에 떠밀려 난 변두리 이웃들의 애환에 뜨겁게 감응했고, 진솔하게 문학화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우묵배미의 사람들은, 고단해도 그 노동에 짓눌리지 않았고, 늘 추웠지만 더불어 나눌 체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향한 애정을 과장해 어설프게 미화하지 않았고, 세상에의 분노를 부추겨 세월의 폭력 위에 또 다른 폭력을 충동질하지도 않았다. ‘왕룽일가’ ‘우묵배미의 사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등 그의 ‘왕룽’ 연작은, 그렇게 시대의 아픔을, 처연한 슬픔과 의뭉의 해학으로 위로했다.

그는 1947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이듬해인 1977년 베트남 참전 체험을 실어 쓴 중편 ‘머나먼 쏭바강’으로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우리 문학에서는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상처를 들고나와, 인간 실존과 역사의 의미를 묵직하게 쳐들었던 그는, ‘인간의 새벽’(80) ‘노천에서’(81) 등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80년대 후반 ‘왕룽’ 연작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큰 애정을 받았다.

그 인기를 데운 것은 그의 문학의 온기였고, 그것은 제 몸과 혼의 열기를 글에 실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궁핍하게 컸고, 그 궁핍함으로 문학에의 열정을 북돋웠다. 고교를 졸업한 뒤 공장과 부두 노동자로 거리의 악사로 생계를 이으며 그 궁핍의 열정으로 세상을 떠돌았고, 그 이력의 몸으로 소설을 썼다.

‘왕룽일가’ 연작을 출간하면서 그는 “여기 담긴 내용은 십수 년간 도시 변두리를 떠돌며 실제 겪은 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며 그의 문학이 ‘오랜 방락벽의 소산’이라 쓰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90년대 전후 ‘우묵배미의 사랑’ 등이 영화로 TV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그게 내심 불편했던 듯하다. 문학에 대한 영상문화의 기술성이, 그 현란한 감응력이 우묵배미의 그늘에 대비됐을지 모른다.

그는 “원작자인 나로서는 영화나 TV드라마로 접근하기보다는 책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다 강력하고 절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라 여기고 있다”고 썼다.

가난한 삶과 가난한 문학에의 열정을 놓아버리고 그가 떠나던 날, 일산 ‘우묵배미’의 새벽 하늘에는 그처럼 홀가분한 그믐 달이 떴다.

오늘의 작가상(1978), 동인문학상(1988)을 탔고, 6년 전부터 부산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유족은 방인숙(53)씨와 1남1녀. 빈소는 일산백병원 영안실7호, 발인 25일 오전 8시30분. 영결미사 오전 10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031)919-2099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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