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 앞에선 비굴하고 약한 자 앞에선 강한 척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야 어찌 되든 자신만 살아 남겠다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삶의 강퍅함 속에서 나약해져 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예의없는 것들’은 주변에서‘싸가지가 하한가’인 사람들을 마주할 때 느끼는 우리의 속내를 말 없는 킬러를 통해 일종의 우화(寓話)처럼 그려낸다.
검은 선글라스, 가죽 점퍼에 과묵함까지. 익히 봐온 킬러 3종 세트를 완벽히 갖춘 듯하지만 ‘킬라’(신하균)는 혀가 짧은 콤플렉스 때문에 아예 입을 닫고 산다. 그는 주방장이었다. 무를 자르는 그의 신들린 칼 솜씨를 눈여겨본 살인청부업자의 제의가 있기 전까지는. 정상인처럼 말을 하기 위해 1억 원짜리 수술이 필요한 킬라는 그 제의를 수락한다.
살인을 할 때마다 피 냄새를 없애기 위해 독한 술을 마시는 킬라. 술집에서 마주친 그녀(윤지혜)는 외로이 술을 마시는 그에게 끈적한 눈길을 건넨다. 킬라의 몸은 그녀를 거부하지 못하지만 머리 속에는 어릴 적 첫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킬러 일이 도살자와 다를 바 없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무렵, 킬라는 업계 선배이자 동료인 ‘발레’(김민준)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게 된다. 바로 세상의 ‘예의없는 것들’만 골라 죽이자는 것. 그러나 음지에서 인간 쓰레기들을 분리 수거하는 킬라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친다.
“재미있게 포장됐지만 쓸쓸한 영화”라는 박철희 감독의 변처럼, 킬라의 계속된 ‘쾌도난마’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일침을 가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에 도사리고 있는 비밀이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재기발랄한 농담과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웃음을 직조해내던 영화는 ‘예의없는 것들’의 대상이 모호해 지면서 개인의 복수극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폼만 잡는 남성 영화와 대책 없는 코미디 사이에서 이 영화는 분명 신선함을 제공한다.
신하균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전하지 못하는 킬라의 답답한 상황을 다면적인 표정 연기만으로 훌륭히 소화한다. 그의 재기 넘치는 내레이션도 극중 웃음을 선사하는데 한 몫 한다. 다음달 열리는 밴쿠버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24일 개봉. 18세.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