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소슬해졌다. 해 떨어지면 선뜩할 정도로 날이 차다. 여름이 가버렸다고 생각하니 쓸쓸하다. 몇 번쯤은 여름 저도 아쉬워서 저만치 가다가 되달려와 제 자취를 서성거리겠지만, 어느 날엔가 까맣게 잊은 듯 아무리 기다려도 불쑥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벌써 밤이 꽤 길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인가, 며칠 전부터 어김없이 울던 귀뚜라미도 조용하다. 냉장고만이 우두둑 관절 꺾는 소리를 내고 운다, 라는 건 내 착각이었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니 사방 천지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가득하다.
이번 여름은 충실히 더웠다. 그 더위를 한 발짝도 피하지 않고 서울에서 보냈다. 내 평생 가장 분주히 산 여름이었다. 멀리 떠나는 친구들과 멀리서 온 친구들을 만나랴, 나한테는 벅찬 길이인 67매 짜리 수필 쓰랴, 수필집 교정 보랴, 기타 등등. 쫓기듯 산다는 게 뭔지 처음 알았는데, 스스로 대견하고 세상에 떳떳한 반면 문득 울적했다.
열심히 아득바득 사는 게 구차하고 비루한 느낌이 들고, 평생 나를 이루어온 뭔가를 훼손당하는 듯했다. 도착(倒錯)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너무 오래 시를 쓰지 못하고 살아서 그럴 것이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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