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으로 가공되고 정치적으로 치장된 영웅이 아닌, 학자 이휘소의 명예를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이 달 말 정년을 맞는 고려대 강주상(65ㆍ물리) 교수가 그의 스승이자 세계적 물리학자였던 이휘소(1935~1977) 박사의 일대기 ‘이휘소 평전’(럭스미디어)을 썼다.
이휘소 박사는 20세(1955년)에 도미, 30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 물리학과 정교수에 올랐으며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등을 거쳐 42세로 요절할 때까지 세계 물리학계를 이끈 과학자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 강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스토니브룩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듬해인 1967년 그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6년간 그의 지도 하에 수학한 사실상 국내 유일의 제자다.
강 교수는 어설픈 애국주의에 얹혀 독재자의 핵개발에 협조하다 권력 음모에 의해 희생된 것처럼 그려진 ‘비운의 영웅 이휘소’가 아니라, 세계 물리학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올곧은 학자로서의 이휘소를 알리기 위해서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릇된 사실에 근거해 그를 영웅시하지 않더라도, 그는 삶과 학문적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입니다.”
강 교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자신의 기억은 물론 각종 문헌과 미국 내 지인들의 증언, 각 대학의 문헌자료 등을 조사했다고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이휘소의 이름 위에 얹힌 온갖 가공의 회칠을 벗겨낸다. “이휘소는 소립자 이론물리학자이지 핵무기 제조 전문가가 아니다.… 소설에서 제기한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책은 고인의 청소년시절과 미 유학생 시절부터 사고 당일의 일까지 연대기 형식으로 그의 삶을 조명한다. 6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 고등연구원 시절 동료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어 생긴 별명이었다.”(120쪽) 저자는 당시 고등연구원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의 고인에 대한 총애나 스토니브룩대학으로 그를 이끈 양전닝(梁振寧ㆍ1957년 노벨상)과의 학문적 교유 등을 그의 연구 성과의 진척과 함께 소개한다. 특히 76년 노벨상 수상자인 리히터와 팅, 79년 수상자인 와인버그와 살람, 99년의 토프트와 벨트만, 2004년 그로스, 윌첵 등의 영광이 이휘소 박사의 연구 결과에 직ㆍ간접적으로 빚을 지고 있음도 논증한다.
정치적으로 중도 진보 성향이었던 고인은 70년대 한국의 독재체제에 반대했고, 핵 확산도 거부한 과학자였다. 71년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이던 정근모 박사가 고국에서 하계 물리학교를 열자고 제의하자 그는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내 거절한다.
“하계 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세인의 눈에 사실과 다르게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까 걱정됩니다. (저의 거절이)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는 2년 뒤인 1974년 AID차관 서울대 원조계획의 미국측 심의위원 자격으로 잠시 귀국, 한국 대학 과학교육에 대한 평가 조언을 했다.
90년대 중반, 소설 ‘무궁화…’의 왜곡에 격분한 유족이 작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벌인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소설이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사회 통념상 위 이휘소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다며 패소 판결했다. 소설로 하여 고인이 더 유명해졌고, ‘명예’가 오히려 높아졌다는 요지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당시 재판부가 밝힌 ‘명예’는 유족과 제가 생각하던 명예와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고 적었다.
한편 소설가 이용포씨도 최근 이 같은 내용의 책 ‘이휘소, 못다 핀 천재물리학자’(작은씨앗)를 펴낸 바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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