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예(藝)'에는 '심는다'는 의미가 있어요. 하얀 공간 속에 여러분의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심어 보세요."
17일 오후 충남 천안개방교도소 강당. 푸른색 수의에 머리를 짧게 자른 재소자 50여명이 바닥에 엎드린 채 '행복나무심기'라고 이름 붙인 미술체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이후 처음 해보는 붓질을 어색해 하던 재소자들은 잠시 뒤 하얀 티셔츠와 부채 속에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한 속내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아들에게 줄 선물입니다"
김모(44)씨는 수감되기 전 가족과 함께 놀러갔던 바닷가 풍경을 부채에 담았다. 어둑한 수평선 너머로 붉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낙조의 풍경이 아마추어의 그림치고는 꽤 수준급이다.
그는 "바쁘게 사느라 아들과 함께 여행한 적이 딱 한 번밖에 없었다"며 "그때는 심드렁하게 지나쳤던 풍경이 오히려 지금 또렷하게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금융기관에 근무하다가 배임죄로 수감된 김씨는 다섯 달 후 5년 형기를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간다.
교통사고를 낸 뒤 합의금이 없어 2년째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천모(35)씨는 잠자는 딸의 모습을 티셔츠 속에 그렸다. 발그레한 볼과 옹알거리는 듯한 입모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천씨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예전에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묻자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녀서…"라며 멋쩍어 한다. 혼자 딸을 키우느라 공장에 다니는 아내가 안쓰럽다며 그림을 그리던 그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재소자들이 말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행사를 마련한 임립(61) 충남대 예술학부 교수는 "미술체험을 시작할 때 재소자들이 관심을 가질까 걱정했는데 너무들 좋아해서 마치 초등학교 미술수업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말했다. 임 교수가 이 행사를 기획한 것은 2003년 전국 재소자미술대회의 심사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됐다. 서툴지만 진솔하게 가족과 고향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림들을 보면서 미술을 통한 교화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임 교수는 지난해 '아름다운 시간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대전교도소와 공주교도소에서 처음 미술체험행사를 연데 이어 올해는 청주교도소 공주교도소 천안개방교도소에서 행사를 가졌다.
임 교수는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그림을 그리는 재소자도 있다"며 "이들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수감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공주교도소에 살인죄로 수감돼 있는 무기수 이모(40)씨의 재주가 아까워 지난해부터 이씨가 애니메이션을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올 행사에는 몸이 불편한 구족화가들이 참여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재소자 나모(41)씨는 "입과 발로 간신히 붓을 잡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 교도소 재소자들의 그림 가운데 좋은 작품들은 25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충남 공주시 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2006 행복나무심기 예술제'에 전시된다.
천안=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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