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타계한 강원용 목사는 한국 교회의 존경 받는 어른이었다. 그의 삶은 역사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한 평생이었다.
1993년 펴낸 자서전 ‘빈들에서-나의 삶,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들이 내게 ‘당신은 누구요, 종교인이요?’ 하고 물을 때,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회개혁가요?’ ‘아니오’ ‘그러면 정치가요?’ ‘아니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한국이란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요’라고 한다.”
그가 크리스챤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를 설립해 종교간 대화와 인간화 운동을 펼치고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ㆍ인권 운동에 앞장서는 등 교회에 갇힌 신앙이 아닌, 사회적 실천에 힘쓰는 신앙에 진력한 데는 언제나 그런 자세가 깔려 있다.
1917년 함경남도에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강 목사는 집안의 반대를 꺾고 열네 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1935년(당시 18세)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소 판 돈 70원을 갖고 만주 용정으로 가 그곳 은진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며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해방이 된 뒤 정치지도자 김규식, 여운형 등을 도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고인은 갈수록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하는 현실을 보고 청년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선한 사마리아 사람 형제단’(선린형제단)을 결성했다.
이 모임이 강 목사의 은진중학교 시절 은사인 김재준 목사를 설교자로 모셔와 1945년 12월 2일 첫 예배를 본 것이 경동교회의 출발이다. 강 목사는 김재준 목사의 뒤를 이어 1949년부터 1986년 은퇴할 때까지 경동교회 목사로 일했다. 강 목사와 경동교회는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었으며 1974년부터 개신교회로는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민족 명절인 추석에 지내는 등 기독교 토착화에도 앞장섰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사상을 형성한 힘에는 미국 유학 시절 뉴욕유니언신학대에서 만난 세계적인 신학자 폴 틸리히와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이 크다. 두 사람으로부터 양극의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는 ‘사이와 너머’의 철학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삶의 지표로 삼았다.
열린 사랑, 열린 사상, 열린 종교로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그의 노력은 1965년 국내 첫 종교간 대화 모임을 주선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그가 설립한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나서서 개신교, 가톨릭,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의 6대 종단 지도자가 모여 한국 종교의 공동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이 자리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것이어서, 보수적 교단으로부터 ‘짬뽕 신앙’을 만든다는 비난을 사거나 ‘회색 분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 강 목사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 중심에는 그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63년 설립한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있다. 크리스챤아카데미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인간화를 주력 사업으로 정하고, 종교ㆍ농민ㆍ노동자ㆍ여성ㆍ학생단체를 대상으로 사회 갈등을 중재할 ‘중간집단 양성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 활동을 반정부 의식화 교육으로 판단, 1979년 한명숙 국무총리 등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6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남녀평등을 강조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여성운동 지도자들은 그가 가부장적 권위에 매이지 않은 보기 드문 남자였다고 회고한다. 한국여성개발원장을 지낸 박인덕씨는 강 목사가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남성도 해방될 수 없다” “여자를 구속하는 것은 곧 남자를 구속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한다. 강 목사는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 교육 강사로 직접 나섰고, 1974년 기독교 장로교 총회에서는 여성 목사 제도의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강 목사의 사회 참여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그는 해방 정국의 좌우합작 운동부터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까지 한국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5ㆍ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 밑에서 방송윤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고 5ㆍ6공 군사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성경은 배타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 내 교회는 기독교인만 모인 장소(교회)가 아니라 세상 전체’ 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옹호했다.
그는 1986년 41년간 이끌어온 경동교회 목사 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1995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직에서도 은퇴했다. 그 뒤로도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한국기독교 100주년 秀餓獰宅?이사장, 평화포럼 이사장을 맡아 사회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헌신하는 것을 생애 마지막 소명으로 삼고 2000년 평화포럼을 출범시켰다. 이 단체를 시작하면서 그는 “나는 나이 때문에 통일을 못 보고 가겠지만, 평화통일의 터를 닦아 멀리서라도 그 가능성을 보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 마지막 꿈을 접고 그는 하늘로 돌아갔다.
◆연보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출생
1931년 기독교 입교. 차호공립보통학교 졸업
1940년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영문학부 졸업
1948년 한신대 졸업(학사)
1956년 미국 뉴욕유니언신학대 졸업(학사)
1962년 캐나다 매니토바대 졸업(신학박사)
1949~86년 경동교회 목사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ㆍ중앙위원
1963년 크리스챤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 설립. 원장 취임.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
1994년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1986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
1987~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1988~91년 방송위원회 위원장
1998~2000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1998년~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자문위원
1998~99년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1998~2003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2000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2000년 (사)평화포럼 이사장
2004년 (재)실업극복 국민재단 이사장
◆저서
'새시대의 건설자', '폐허에의 호소', '자유케 하는 진리', '인생과 종교', '강원용과의 대화', '여해 강원용 전집', '믿는 나와 믿음없는 나', '빈들에서', '역사의 언덕에서'외.
오미환 기자 mhoh@hk.co.kr
■ 강원용 목사님 영전에 "목사님, 정말 그립습니다."
강원용 목사님. 목사님의 갑작스런 부음을 접화고 슬픈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간사 일을 하며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돌아보건대 목사님은 넓은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 역사와 세계사의 흐름에서 올바른 입장을 대변해오셨습니다. 목사님은 한국 역사에서는 여운형 선생의 뜻을 이어가셨습니다.
기본적으로 반공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비인간화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을 견지하려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남한과 북한에 아직도 다양한 사상의 주장을 허용하지 않는 냉전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선각자적 자세는 더욱 귀중하게 생각됩니다.
목사님께서 설립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중간집단 교육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아주 선진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독일 노총의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모델로 한 이 교육은 ‘자유 평등 인간화’라는 이념을 내걸었지요. 교육 참가자들을 소중한 인격으로 대하고 교육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4박5일간의 짧은 기간 안에 놀라운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이 중간집단 교육 모델은 민주적 사회운동은 물론 새마을 교육에도 도입될 정도로 한국의 사회교육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습니다. 노동자, 농민, 주부, 학생들이 교육을 마치고 나가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70년대 유신체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민주적인 대중운동이 태동하고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육 이수자들의 활발한 활동을 주목한 공안기관이 사회주의 학습을 했다는 혐의로 저희 간사들을 구속하는 등 탄압을 가함으로써 중간집단 교육은 안타깝게도 중단되고 말았지요. 저희들도 큰 고통을 겪었지만 목사님이 겪었을 말 못할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만년에 목사님은 평화운동에 매진하셨습니다. 평화포럼을 만드시고 평소 선생님의 소신인 ‘대화로서 남북간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발표하셨습니다. 아직 북한의 변화가 더디고 미국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기는 합니다만 목사님 말씀대로 끈기를 가지고 대화를 해나갈 때 변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계속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극단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노후와 질병, 자녀ㆍ취업 문제 등에 불안해 하며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산율이 너무 빨리 저하하여 앞으로 우리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목사님의 말씀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너무 애통합니다. 목사님의 지혜에 힘입어 우리 사회가 하루 속히 인간화하기를 빌겠습니다. 목사님 부디 편안히 잠드십시오. 장상환 올립니다.
장상환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 "한 시대가 마감" 각계 인사 애도
17일 강원용 목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종교계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의 애도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강 목사님은 평화와 사랑, 그리고 대화를 위해 언제나 선구자로 사신 분”이라면서 “자신의 편안한 삶을 뒤로 미룬 채 항상 조국의 평화를 먼저 생각하며 종교, 사회 각 분야의 통합에 앞장 서신 분이셨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 총리는 강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간사로 활동하다 1979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한 총리는 “강 목사님이 가셨다고 하니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조국의 평화와 미래를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애통해 했다.
강 목사의 임종을 지킨 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는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매주 교회에 오셔서 설교도 가끔 해 주실 정도로 정정하셨는데…”라며 “(한국 개신교의) 큰 별이 지고 한 시대가 지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 사회가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마다 큰 빛이 되어 주셨던 강 목사님의 소천(召天)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며“하느님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날 오전 11시께 삼성서울병원을 직접 방문해 기도했다.
불교계도 애도를 표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사회 민주화에 끼친 고인의 남다른 정의감과 열정은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이루는 밀알이 되었고, 종교간 화합이나 분단된 민족 갈등을 통합하는 데 있어 종교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은 “30년간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존경하던 어른이었다”며 “강 목사님은 개신교 지도자 뿐만 아니라 민중,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 종파, 노사 간 대화를 이끌고, 대화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려 노력한 민족의 스승”이라고 회고했다.
학계,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 인물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한 시대가 마감한 것”이라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극인 박정자씨는 “고인은 윤석화 씨 등 평소 아끼는 문화예술계 지인들의 공연을 빼놓지 않고 관람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며“종교인으로서 항상 열린 자세 때문에 때로는 비판도 받으셨지만 문화예술인에겐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은 “강 목사님은 남성이면서도 여성 문제에 선구적 식견을 갖추고 여성 교육에 많은 도움을 주신 스승이었다”면서 “한국 여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강 목사 빈소에 이정호 시민사회수석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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