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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라스의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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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라스의 주홍글씨

입력
2006.08.1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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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같은 시인을 감옥에 가둬놓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겠다던 귄터 그라스는 30여년이 지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그라스는 이 시에서 축구를 빌어 절묘하게 시인, 넓게 말해 작가 혹은 지식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현실의 게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그들은 운명적으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할 수밖에 없다.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 비판적 좌파 지식인의 대변인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이 알려주듯 그라스는 이 시의 고독한 시인처럼 인류의 이상이라는 골대를 향해 누구보다 앞서 가며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던 작가였다.

나치 비판, 반핵운동,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반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비판 등 20세기와 함께 달려온 그라스는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1972)에서 작가를 "악취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악취를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존재의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는 한층 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작가가 됐다.

이런 그라스가 최근 2차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인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적이 있다고 62년만에 털어놓으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17세 때인 1944년 SS 제10기갑사단에 배치돼 종전까지 복무했다는 사실을 내달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언론에 밝힌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 취급 하는 모양이고, 일부는 노벨문학상 반납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독일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더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그를 만나면 악수하지 않겠다"며 그라스의 출생지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 명예시민 자격 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왜 60년이 넘게 이를 숨겨 왔을까. 그는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아내 말고는 자식들도 몰랐다"며 "젊은날 세상 물정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이후 줄곧 나를 짓눌렀으며, 그것은 나의 '주홍글씨'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홍글씨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양철북'(1959)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의 입을 통했든, 47그룹의 동료 하인리히 뵐이 자신보다 27년이나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든, 그는 더 일찍 자신의 악취에 '이름을 붙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가 2002년 방한시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했던 말이 지금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8월은 오욕의 시간이다. 그라스의 고백에, 이라크전 일으켜 그로부터 욕 먹었던 부시와 블레어, 8ㆍ15에 신사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혹은 땅찾기에 혈안인 이 땅의 친일파 후손 등등 평소 고상한 문학이니 이상이니 따위 경멸해왔을 세계의 현실주의자들은 "거 봐, 잘난 척하더니, 너희들은 별 수 있냐" 하며 코웃음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세기'(1999)를 소설로 썼던 노작가의 인간적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라스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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