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낳았을 텐데, 어쩌다가 아이 이름을 돌이라고 지었을까. 게다가 성이 지씨여서, 여기서는 '지돌이 할머니'라고 부른다. 192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 85세, 할머니가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몇 해가 된다. 경기도 광주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터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 위안부 할머니들의 內傷
때때로 지돌이 할머니는 방안에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남편을 기다린다. 결혼 4년 만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으니 할머니의 생애에서 그 시절 그 4년은 꽃피는 봄날이었으리라. 그 과거 속에서 남편은 무청처럼 푸르고 싱싱할 테니 할머니 또한 새순처럼 고운 청춘이 된다.
그래서 할머니는 오늘도 남편을 기다린다. 이따금 한밤에 뒷산을 오를 때도 있다. 밤중에 뒷산에는 왜 올라갔느냐면, 남편을 찾으러 나갔었다는 할머니의 말이 가슴을 메이게 한다. 이것이 오늘 할머니가 겪고 있는 치매의 세계다.
지난 2월에는 이곳에 머물렀던 박두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위안부 시절 맞은 매로 귀를 다쳐 평생을 중이염으로 고생하다 끝내 청력을 잃고만 분이다. 거동이 불편해지자 하는 수 없이 노인전문 요양시설로 나가야 했던 박두리 할머니가 고생 끝에 세상을 떠났을 때, '요양시설만 있었더라도' 마지막을 그렇게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나눔의 집 사람들은 눈물로 한을 삼켜야 했다.
생각하기만 해도 서럽기는 배춘희 할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집강박증'이라는 낯선 증세에 시달리는 할머니는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방에다 숨기듯 쌓아놓는다. 이불이며 신발에 음식까지 보이는 것은 모조리 방에 쌓아놓고 버릴 줄을 모르니, 방에는 잠 잘 틈도 없다.
바퀴가 들끓고 냄새가 진동하는 방을 청소라도 하면, 할머니는 '나쁜 놈들!'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한 동안은 '삐져서' 지낸다. 그러나 그 청소가 할머니 세계의 강탈이라는 것을 누가 알랴. 어려서 아빠가 사준다고 했던 '꼬까신'을 끝내 신어 보지 못하고 위안부로 끌려다녀야 했던 마음의 상처가 그렇게 물건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지금도 제복이라면 기가 질린다. 그래서인지 군인들이 나타나면 다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를 않는다. 일본군의 군홧발에 걷어차이던 요란한 문소리의 기억이 남긴 상처들이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이렇게 아물지 않는 역사의 내상(內傷)에 오늘도 고통스럽다. 2002년 여성가족부의 조사에 의하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가운데 68%가 동거가족이 없는 독거생활을 하며, 가혹했던 '위안부' 피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까지도 박두리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 가고 싶어. 날 데려다 줘'하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를 모실 요양시설이 없다. 길은 이것 밖에 없다는 절실함에서 나눔의 집이 '무료노인전문요양시설' 설립을 추진한 것이 2002년 말, 그러나 관계당국은 환경정책법이니 환경부 고시니 하는 조항들을 내세우며 요양시설인가를 3년 넘게 불허하고 있다.
● 나눔의 집, 요양시설 허가하라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기존의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가면 되지, 굳이 따로 지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위안부'였다는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내상에 고통 받으며, 남들과 적응하지 못한 채 홀로 숨듯이 살아가야 하는, 이분들은 그냥 할머니가 아니다. 그 기막힌 '가슴'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행정편의적인 발상으로 조례니 규정을 내세워 방치하다가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돌아가시고 난 후에 남을 저 통한을 어찌할 것인가.
이 할머니들만의 요양시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절실하다. 이 나라 행정에는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특수성을 이해할 '가슴'은 정녕 없는 것인가.
한수산 작가ㆍ세종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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