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서민교 조사위원은 지난해 10월 일본 고베(神戶)에 있는 한 재일 동포의 집을 방문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B5 크기의 노트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강화도 조약ㆍ1876) 하기도 전인 1875년 자료부터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 경술국치까지 일본 신문들이 기록한 ‘조선’ 관련 기사가 빠짐없이 수록돼 있었다. 정리된 신문 스크랩 분량만 175권 8만여장. 한 사람의 힘으로 모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한 양이었다.
“쌀과 금ㆍ은을 빼고 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많이 수탈해 간 품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에요.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조선의 황소를 일본 소와 교배해 경작에 이용했지요.”
광복절을 앞두고 구한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박영효(朴泳孝ㆍ1861~1939)에 관한 자료수집차 방한한 재일동포 2세 사학자 김경해(金慶海ㆍ68)씨는 13일 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100년도 훨씬 넘은 일본 신문 기사를 가리키며 울분을 토했다. 그가 내미는 신문 스크랩에는 당시 일본이 수탈해간 소의 통계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가득했다. 조선 유곽에 관련된 정보 등 개화기 당시 조선의 풍습과 생활사까지 엿볼 수 있는 생생한 기사도 적지 않았다.
“개화기 조선 관련 기사를 모두 찾기는 정말 어려웠지요.”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100년도 더 된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했던 고베 등 효고(兵庫)현 지역 신문은 물론, 도쿄(東京)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규슈(九州) 멀리는 홋카이도(北海道)까지 일본 전역의 대학과 공사립 도서관을 샅샅이 훑으며 마이크로 필름을 복사했다.
“한 번 출장을 가면 개관부터 폐관 시간까지 하루종일 도서관에만 살았어요. 100년 전의 기사인지라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말이 많이 등장해 해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열흘 동안 한 건의 기사도 찾지 못해 허탕을 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입을 꽉 물고 덤불에서 바늘찾기 식의 작업에 매달리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어금니까지 모두 잃을 정도로 몸은 망가졌지만 스크랩은 점점 쌓여갔다.
그가 ‘조선’관련 기사 찾기에 매달렸던 것은 자신의 지나온 삶과 무관치 않다. 김씨는 총련 출신이다. 제주 출신인 선친은 1920년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와 고베에 터를 잡았다. 광복의 격동 속에 선친이 북을 지지했기에 그 역시 대학 졸업 때까지 총련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63년 고베 민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재일동포의 역사를 기록한 변변한 자료 하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동포사회의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를 찾는 것이었다. 틈틈이 모은 자료를 취합해 분석한 책이 79년 펴낸 ‘1948년 한신교육투쟁’이다. 책에는 해방 직후 오사카와 고베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 조선인의 민족 교육과 투쟁의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은 6월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81년 교직을 떠난 후로는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에 나섰다.
노작(勞作)의 대가는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흔쾌히 자료를 제공했다. 지난해 12월 한국에 들여온 자료는 제본 과정을 거쳐 현재 전산화(DB)를 앞두고 있다. 서 조사위원은 “개화기 초창기의 조일 관계, 발굴되지 않은 인물,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 등 다양한 정보가 축적돼 있어 당시 한일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수집 자료 중 제주 관련 기사만 따로 모아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씨는 요즘 박영효(朴泳孝ㆍ1861~1939) 연구에 푹 빠져있다. 그는 “당시 일본 신문에는 박영효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다”며 “흔히 친일 인사로 알려진 그에 대해 자료를 근거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동포 사회는 ‘풍화(風化)’라는 새로운 적을 맞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싸워 왔지만 갈수록 ‘나는 누구인가?’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더해지는 것이지요. 자라면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일본인화하는 3, 4세 동포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저의 역할이 막중함을 느낍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연구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