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이 터질 때 조선의 조정은 주전론으로 흘렀다. '삼학사'로 불리며 대대로 절의를 칭송받은 홍익헌, 윤집, 오달제는 물론이고, 강직한 언필로 유명했던 김상헌도 강하게 주전론을 폈다. 오직 최명길만이 주화론에 매달렸다.
전세가 급히 기울자 주화론이 대세가 됐고,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며 통곡했다. 그는 삼전도의 굴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해 두문불출했으나 위험인물로 지목돼 선양(瀋陽)으로 끌려가 4년 동안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한편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화친이 이뤄지고, 청군이 물러간 뒤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공을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군대 파견 요구를 물리쳤다.
요즘으로 치면 이념과 노선이 전혀 달라 평생 원수지간이 됐을 김상헌과 최명길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높이 여겼다. 최명길은 김상헌의 기개와 절조를 높이 샀고, 김상헌은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짚을 줄 아는 최명길의 지혜를 평가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삼학사'와 김상헌의 절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반면 최명길의 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유교적 전통 때문이다. 심지어 최명길에게 변절의 굴레를 덧씌워 당시의 주전론에서 쉽게 '자주' 의식을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전론이 친명론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간과했다.
● 현실을 읽은 최명길의 지혜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 글을 읽은 선비라면 으레 명분론이나 의리론에 젖게 마련이었다. 주전론이 명나라와 임금을 사고의 중심에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화에 시달린 백성의 삶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면 주화론은 명나라와의 의리나 임금의 굴욕보다 백성의 삶이 피폐해질 것을 우려했다. 생활인 중심으로 역사를 복원해야 할 지금의 눈에 최명길에게 덧쒸워질 뻔했던 변절의 굴레는 부당하다.
'변절(變節)은 지조나 절개를 버리는 것으로 우리 전통에서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도 '변절'이다. 또 절(節)이란 원래 대나무 마디를 가리켰지만 대나무를 쪼개서 키처럼 엮어놓고 긁어서 리듬을 표현하는 악기의 이름이기도 했다.
거기서 파생돼 노랫가락이란 뜻도 나왔다. 이런 뜻에서라면 '변절'은 늘 같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맞춰 다른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된다. 이런 '변절'이라면 욕하기는커녕 칭송할 일이다. 지탄받아 마땅한 것은 개인적 욕심을 위해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변절만이다.
그런데 변절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너무 깊어서 좀처럼 태도나 의식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환경은 수시로 바뀌는데 어느 순간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일단 인식의 바탕에 요철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 일관성이란 미명으로 치장되기도 하지만 실은 게으름이나 집착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이데올로기나 정치 문제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전시작전통제권이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나라가 두 쪽 날 듯 한 것도 양쪽 다 사고의 탄력성이 결여된 때문이다. 다양한 변수를 무시한 채 오직 자주파와 동맹파, 쇄국파와 개방파에 몸을 던지기에 바쁘다. 그러니 제대로 토론이 되지 않는다. 대중을 말려야 할 지식층과 지도층이 오히려 군불때기에 바쁘다.
● 개인 욕심 위한 변절과 달라
누가 치열한 학습과 고민 끝에 기존의 규정에서 벗어난 태도를 보이면 변절했다고 욕만 해댄다. 스스로의 지적 태만이나 개인적 욕심을 은폐하려는 태도다. 아무리 해바라기를 욕해도, 하루에 두 번만 맞는 고장난 시계가 자랑스러울 리 없다.
장자는 위(衛)나라 대부로서 공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거백옥에 대해 이렇게 썼다. '육십이 될 때까지 육십 번을 변했다. 일진월보(日進月步)하며 정지하지 않았고, 육십에 오십구년의 잘못을 깨달았다.'
답답한 세상에서 눈을 돌려 여론주도층의 적극적 '변절'을 꿈꾼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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