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명저 ‘국화와 칼’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6월, 지루한 전쟁의 끝을 앞당기려던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비롯된 책이다. 미(美)와 무(武)를 동시에 숭앙하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패턴을 탐구하자는 것이었다. 서구인들은 잘 이해할 수 없는 동양 문화, 아니 일본 문화의 핵심이 절묘하게 응축돼 있다.
일본인 아내와 20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는 언론인 채명석(57) 씨는 ‘단도와 활’(미래M&B 펴냄. 1만 3,000원)이라고 받는다. 베네딕트의 저작에 대한 대구이기도, 한일 관계를 빗댄 말이기도 하다. 지도에서 볼 때 일본 열도가 활 모양으로 늘어서 있다면, 그 활의 중앙부를 비수처럼 겨누고 있는 것이 바로 한반도라는 것. 그렇다면 둘의 심사는 얼마나 불편할까. 실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불편한 마음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말썽 많은 후쇼샤 판 역사 교과서를 보자. ‘조선 반도는 일본 열도를 향해 끊임없이 돌출된 흉기’라며 그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채씨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인 벽들의 정체와 유래, 그것들이 누대에 걸쳐 확대 재생산돼 온 역사를 밝히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일본은 있네, 없네’하는 사람들이나 욘사마니 한류니 하는 현상이 한일 간의 벽을 없애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 모두가 일본의 벽에 갇힌 희생자들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벽에 갇힌 A급 전범이 박정희에게 훈장을 수여한 사실은 한일 관계의 모순을 극명하게 상징한다.
야스쿠니 신사를 찾으면서, 부시 앞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열창하는 고이즈미 총리에게서 일본 정치의 벽을 본다. 역사 왜곡만큼이나 고질적인 세습 정치의 뿌리는 그들의 엄격한 신분주의를 상징한다. 일본의 허름한 선술집마다 걸려 있는 붉은 제등 아카초칭에서 저자는 안팎이 전혀 다른 일본 문화와 무사도의 폐해를 읽어낸다.
저자가 확보한 방대한 자료, 그것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문장력, 흔들림 없는 시각을 확인해 가는 과정은 감각적인 일본론의 접근법과는 격을 달리 한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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