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씨름계가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10여년 간 '모래판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이태현(30)이 최근 은퇴 선언과 함께 일본의 종합격투기 프라이드(프리스타일)로의 전격 진출을 선언, 가뜩이나 침체에 빠진 씨름계가 더욱 휘청거리게 됐다. 2004년 말 LG씨름단 해체를 시작으로 지난해 말 신창건설마저 해체돼 한껏 위축된 모래판에 '민속씨름의 보루'였던 이태현 마저 등을 돌린 것이다.
이태현은 민속씨름의 황금기를 맛봤던 마지막 세대다. 1983년 출범한 민속씨름은 최욱진 이만기 등이 구사하는 현란한 뒤집기 등으로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150㎏에 육박하는 덩치들이 관중을 외면한 채 재미 없는 씨름으로 기술 씨름을 제치고 정상에 오르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됐다.
더욱이 8개 팀까지 있었던 프로 팀이 97년 외환위기 이후 잇달아 해체되면서 프로라고 내세우기에는 궁색한 처지로 전락했다. 현재는 현대삼호중공업만이 프로구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팀 해체로 갈 곳이 없어진 선수들이 지자체 팀으로 흡수돼 프로와 아마가 함께 대회를 치르고 있어 프로종목으로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셈이다. 지난해에는 3개 대회만 열렸고, 천하장사 대회는 열리지 조차 못했다.
이런 와중에 터져 나온 이태현의 격투기 전향은 모래판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 때문에 충격이 더욱 크다. K-1에 진출한 최홍만과는 상황이 다르다. 2004년 말 당시 최홍만의 소속팀은 해체된 상태였고, 신생팀 창단이나 다른 기업으로의 인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93년 데뷔한 이태현은 화려한 기술과 훤칠한 외모로 3차례나 천하장사에 등극했고, 통산 최다인 18차례 백두장사에 오르는 등 '씨름황제' 이만기 이후 민속씨름을 대표하는 스타였다. 630경기에 출전, 472승158패(승률 74.9%)로 역대 최다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현역 선수중 이태현 만큼 모래판에서 혜택을 누린 선수도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학강단에 서기 위해 은퇴한다고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프라이드 진출을 결정한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다. 이태현을 잘 아는 씨름계 인사들은 "이태현을 키우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는데 배은망덕하다"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는다.
물론 그의 결정을 이해할 만한 부분도 없지 않다.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뛸 대회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한 대목은 공감이 간다. 잇단 팀 해체로 김경수 신봉민 등 동년배 라이벌들이 모래판을 떠난 데다 아마 선수와 싸워야 하는 부담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강단에 서는 것이 아니라 현역으로 더 뛸 여력이 있다면 그 무대는 당연히 모래판이어야 한다는 것이 씨름인들의 생각이다. 그 동안 민속씨름으로 얻은 명성과 테크닉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고사위기에 몰린 씨름계의 버팀목이 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태현의 퇴장으로 당장 씨름계가 큰 타격을 받겠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다. 민속씨름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속속 흥행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격투기로 전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태현 파동을 계기로 민속씨름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지 않도록 한국씨름연맹과 문화관광부가 나서 민속씨름의 활성화 대책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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