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末伏)이다. 삼복의 끝이지만 기상청은 아직 더위가 남았다고 예고한다. 그래도 어제 입추는 지났다. 물론 가을로 접어든다는 뜻의 ‘입추(入秋)’가 아니라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억지로 ‘가을을 세우는’ 입추(立秋)다. 사람이 계절을 밀고당길 수야 없지만 어서 가을이 오길 비는 마음에서 관념 속에 가을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더위를 끝장내는’ 처서(處暑)로 넘어간다. 삼복은 무관하지만 입추나 처서 등 24절기는 단순한 관찰의 결과가 아니다. 거기에 인간의 주관을 곁들였기 때문에 체감 계절보다 이르다.
■올 여름이 유난히 덥다는 느낌도 통계적 사실과는 다르다. 지난 30년을 평균한 ‘평년 기온’을 웃돈 것은 분명하지만 2004년이나 1994년의 더위에는 비할 바 아니다. 낮 최고 기온이나 열대야 일수 모두 그렇다. 올 서울의 최고 기온은 34.7도지만 2004년에는 36.2도, 94년에는 38.4도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더울까. 장마가 길어져 7월 하순의 무더위를 겪지 않는 바람에 더위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기상청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 인체의 면역이 감염의 기억에서 비롯하듯, 더위를 이기는 ‘면서(免暑)’도 더위의 기억과 관계가 있다. .
■더위는 병원체와 많이 닮았다. 기후 변화나 신종 병원체는 인간 진화의 역사를 좌우해 온 대표적 환경 인자다. 병원체에 대항할 안정된 면역체계를 확보한 인간은 살아 남았고, 그 유전자를 후손에 물려주었다.
우리는 그 싸움에서 이긴 영웅들의 후손이다. 병원체는 또 강한 면역력을 주기도 했다. 기후 변화도 다르지 않다. 인간의 먼 조상은 밀림이 초원으로 바뀌면서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혹독한 빙하기가 구인류와 현생인류의 주역 교체를 불렀고,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현생인류를 지구상 곳곳에 퍼뜨렸다.
■지구는 확실히 더워지고 있다. 화석연료에서 나온 온실가스 때문이든, 주기적 지구 온도 변화의 결과든 온난화 현상만은 뚜렷하다. 에어컨 등에 의존해 이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도시의 열섬 현상에서 보듯 인공의 시원함은 환경에 폐열을 되돌려준다. 나무나 물 등 자연에 의존할 수 있지만 방으로 끌고 들어오긴 어렵다.
온실가스 감축 등 가능한 노력을 다하는 한편 몸으로 기온 상승에 버틸 태세를 갖춰야 한다. 혈액의 무기질 농도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많은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즐겨 땀을 흘리는 버릇이야말로 궁극의 ‘면서’이자 새로운 진화의 출발점일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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