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에서 이혼녀와 사귀다가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된 남자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친다. 남자의 절규와 달리 영화는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러니 “변한 사랑에 속았을지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그러나 지난해 300만 관객을 울린 신파 멜로 ‘너는 내 운명’은 ‘봄날은 간다’를 비틀어 시간의 때를 타지 않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웅변한다.
세상 모든 것을 변질시키는 시간의 파괴력에 한치도 잠식되지 않는 사랑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충무로의 이단아’ 김기덕 감독의 13번째 영화 ‘시간’은 ‘봄날은 간다’와 ‘너는 내 운명’처럼 사랑은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것인지에 대한 간단치 않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은 앞의 두 작품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김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전통적인 영화 화법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표현의 세계를 펼쳐낸다. 영화는 멜로의 표피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스릴러의 긴장감으로 관객들을 사랑의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사랑에 대한 탐구를 시간을 둘러싼 인간 실존의 문제로까지 확장한다는 점도 확연히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영화는 2년간 만나온 오래된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여자 세희(박지연)는 자기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남자 친구 지우(하정우)의 사랑을 의심한다. 시간을 되돌려 사랑의 첫 느낌, 그 설렘을 되찾는다면 둘의 애정은 불변할 것이라고 믿는 세희는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다. 그리고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꾼 새희(성현아)가 되어 지우에게 접근한다.
‘시간’은 김 감독의 고유한 색깔이 많이 탈색된 작품이다. 광포한 폭력적 이미지가 사라진 곳에 웃음기 머금은 엉뚱한 대사와 상황 설정이 자리잡고 있다. 전작들보다 부드러워졌고 유머가 가득하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세희가 성형이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하고, 새희가 예전의 자신인 세희에게 질투를 느끼며 기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상상력 등은 김 감독의 인장을 확실히 드러낸다.
김 감독은 “새로움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반복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 사랑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그는 사랑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즉답을 피한다. 대신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와 동일한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사랑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만을 남긴다. 24일 개봉, 18세.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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