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한반도'는 명성황후(1851~1895)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뮤지컬 '명성황후' 역시 일본의 침략 야욕과 맞서는 '국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문화 예술의 소재로 차용된 명성황후는 대체로 굳세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표현된다. 최근에는 독일인이 촬영했다는 명성황후 추정 사진을 놓고 또 한차례 진위 논란이 벌어졌다. 그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적지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 낭인에 의해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비운의 운명때문인지 명성황후는 자주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그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궁금증이 있었다.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사진 혹은 초상화는 아직 공인된 게 없다. 도리어 사진이 나올 때마다 의혹만 커진 게 사실이다.
사학자 문일평(1888~1939)은 1920년대에 쓴 '사외이문'(史外異聞)에서 고종이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에 궁중에서 사진 촬영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 적이 있다. 또 잡지 '삼천리'는 1933년 9월 호에서 '민비의 낯을 보았다는 이가 없다'고 적었다. 이로 미뤄볼 때 명성황후의 얼굴과 사진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그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명성황후는 격동기 한국 역사의 주인공이다. 또 사진 촬영이 가능했던 시기에 생존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어느 역사적 인물보다 사진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만약 사진이 실재한다면 당시 왕비의 옷차림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실제 문일평 선생의 글을 읽으면 사진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진위를 둘러싸고 설이 분분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명성황후 사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진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선 당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는 사진을 찍으면 혼이 나간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다 몰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친정 부모가 암살된 뒤 대인공포증에 시달리며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고, 그로 인해 궁중을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신분 노출을 꺼렸던 만큼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았을 수 있다. 어의(御醫)로서 왕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언더우드 여사 조차도 수 차례 사진 촬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는데 과연 어느 누구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박선희 상명대 교수의 견해도 비슷하다. 이들은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여사나, 그를 네 번이나 알현한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과 같은 외국 여인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기를 즐겨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1895년 주한일본공사와 접견할 때 발을 쳐놓고 그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손목에 실을 감고 어의의 진맥을 받을 정도로 내외가 엄격했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가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흥선대원군(1820~1898)이나 고종(1863~1904)의 사진이 있지만 이는 대한제국이 성립한 1897년 이후의 것으로, 명성황후가 숨진 1895년 이전의 것은 없다. 이 때문에 서영희 교수는 "만약 명성황후가 5년 정도 더 살았다면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생전에는 촬영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논란이 된 사진 속 여인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사람들의 표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사벨라 비숍 등 명성황후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성황후의 눈매가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창백하다고 표현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최근 논란이 된 독일인의 사진 속에 나타난 여인이 가장 명성황후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등으로 따져보면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복식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선의 왕비는 평상시에는 당의에 첩지머리를 하지만 의식이 있을 때는 황원삼에 또야머리, 더 중요한 의식에는 적의에 대수머리를 했다. 당의 보다는 황원삼, 황원삼보다는 적의가, 첩지머리보다는 또야머리, 또야머리보다는 대수머리가 더 화려하다.
이 기준을 따르면 논란을 일으킨 사진 속의 여인들은 모두 왕비의 의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게다가 궁궐에는 병풍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사진의 배경이 너무 초라하고 어수선하다. 일부에서는 "사진 속 여인이 고종과 함께 있거나, 적의와 대수머리를 하고 있으면 좀 더 쉽고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 논란 속 세 사진
'명성황후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일었던 사진은 크게 세 종류다.
우선 이승만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그러나 평민이 입는 적삼을 입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낮게 보는 사람이 많다. 이 사진은 주 프랑스 공사, 육군참창 등을 지낸 민영찬(1873~1948)이 동아일보 1930년 1월 21일자에 명성황후에 대해 쓴 기사와 함께 실리기도 했다. 민영찬은 명성황후와 같은 민씨 집안으로, 그의 주선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동아일보 1933년 10월 9일자에도 같은 사진이 게재됐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민영찬과 명성황후의 가까운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사진 속 주인공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1930년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이 틀렸다면 민영찬이 분명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고 그 경우 1933년에 같은 사진이 다시 게재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이 맞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학자 문일평(1888~1939)이 1920년대에 쓴 '사외이문'(史外異聞)이라는 책에서 '이 사진을 알만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아니라고 대답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종류는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 등에 실린 사진이다. '독립정신'의 사진보다 옷이 화려하고 머리도 말아올려 치장을 많이 한 것이 특징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머리 장식 등을 보면 당시 사람의 신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사진 속 여인은 일반 궁녀가 대개 비녀를 하나 꽂은 것과 달리, 비녀 두개를 꽂고 옷도 화려해 왕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로 복식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이들은 사진 속 여인의 옷이, '독립정신'의 그것보다 화려하다고는 하나 왕비의 의복으로는 초라하다고 말한다. 머리도 어느 정도 장식은 했지만 왕비의 그것은 이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된 사진은 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이다.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 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 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황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사실이 확인돼 일단 이 사진은 궁녀로 가닥이 잡힌 상태다.
박광희기자 kh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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