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특수를 겨냥한 납량 공포물들이 극장을 메우고 있다. 머리를 풀어 헤친 소복 차림이거나 충혈된 눈을 부릅뜬 배우들의 얼굴이 실려 있는 포스터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전설의 고향’류의 한참 철 지난 납량물들이 TV와 영화가에서 쫓겨나, 연극무대를 제 마지막 무덤 삼아 부활하려는 모양이다.
놀이동산에서 ‘귀신의 집’류의 오락 거리를 연극과 결합시키겠다는 것일까. 성수기가 드문 연극 동네지만, 7월말~8월초는 특히 비수기다. 산으로 바다로 달아나는 관객들을 붙잡기 위한 안간힘이라면 처연하기까지 하다.
이 여름, 연극의 거리에 선 필자는 한기를 느낀다. 이 시기를 견딜만한 진중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이 차라리 더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뒤숭숭한 마음 추스르고 돌아보니 문득 생의 염천(炎天)을 살다 간 한 여자의 삶이 눈에 띈다. 유럽 원작 뮤지컬을 각색한 ‘까미유 끌로델’.
범람하는 미국식 뮤지컬에 길든 사람들에게, 네델란드 출신의 작곡가 해리 코닝의 음악은 차라리 무덤덤하리라. 노래에 따르는 달뜬 박수도, 수시로 터지는 휘파람 소리도, 화려한 피날레도, 폭력적이거나 에로틱한 군무도 없다. 연극이 떠난 거리, 이 뮤지컬은 연극의 자리를 지키려는 듯 시종일관 진지하고 차분하다. (신시뮤지컬컴퍼니, 손정우 연출)
극은 정신병원에 갇힌 까미유에서 시작해 남동생 폴 클로델과의 우애와 젊은 날의 꿈과 희망에 찬 까미유를 보여주고, 로댕에게 영혼이 붙잡힌 시기, 벗어나 홀로 서려 발버둥치는 시절, 피해 의식과 강박 증세로 몰락하는 말기까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까미유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당대 여론이 가한 인형놀이 끝에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정화하고 다시 까미유 자신인 채로 대리석 앞에 선다. 정과 끌을 높이 들고서.
‘남자에게는 삶의 일부였으나 여자에게는 삶의 전부였던’식의 사랑이야기 틀로부터는 벗어나 있으나, 영화나 전기소설로부터 얻었던 고정관념을 재확인하는 정도에 그쳐 아쉽다. 무엇보다 정력적이고 이기적인 로댕의 성격과 격정적인 까미유와의 흥미진진한 두 인간성의 투쟁이 묽어진 것에 가장 갈증을 느낀다. 광기로 도피함으로써 깨달음과 성장을 차단한 까미유 생애 자체가 극을 한정 짓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삶의 표면을 너르게만 취재한 원작 탓을 해야 할 것 같다. 배해선 김명수 조정근 등 출연, 8월 20일까지 대학로 신시뮤지컬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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