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정원/존 베런트 지음ㆍ정영문 옮김/ 황금나침반 발행ㆍ1만3,000원
존 베런트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그의 출세작 '선악의 정원'(1994년 출간)은, 책 표지 소개란에 적힌 ‘논픽션 작가’라는 설명을 지나쳐버리면 소설(픽션)로 오해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보통은 픽션이 논픽션을 현실성 있게 모방한다지만,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논픽션이 픽션의 형식을 그럴듯하게 차용하고 있다. 내용 또한 허구로 착각할 만큼 극적이다.
무대는 미국 남부 조지아 주의 소도시 서배너(Savannah). 존 베런트는 우연히 이곳을 들렀다가 그 특이한 분위기에 매료돼 8년 동안이나 머무른다. 그는 서배너의 지역 유지에서부터 밑바닥 인생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굴곡진 삶의 단면을 한 편의 기록영화처럼 세심하게 담아낸다. 동시에 ‘파티의 도시’ 서배너 사교계의 ‘아이콘’과 같은 한 골동품상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무너져 가는 과정을 그린다.
서배너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다. ‘잠이 든 듯한 이 도시는 지금보다 과거에 더 중요한 곳’(64쪽)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영광스러운 고립’을 즐기지만, ‘실험실의 통제된 상황 속에 있는 곤충’(111쪽)처럼 작은 변화에도 허둥댄다. 이 폐쇄적인 도시에서는 이미 ‘모든 드라마의 조연들은 오래 전에 배역이 정해진 상태’(253쪽)이기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전통과 보수에 의해 안정적으로 제어되는 조용한 일상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다. 성공과 실패, 배신과 치정, 동성애, 그리고 미국 남부지역의 지울 수 없는 업보(業報)인 인종까지. 뉴욕이나 시카고, 라스베이거스 쯤 되는 이름에나 어울릴 법한 온갖 ‘욕망의 법칙’ 이 정원처럼 아름다운 소도시 서배너의 구석구석을 지배한다. 욕망의 엇갈림, 충돌하는 이해관계 탓에,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진실은 무의미해진다.
수백 년 된 고저택의 정적인 풍경 이면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변주는 서배너가 아니라면 ‘얘기가 안 되는 얘기’다. 결국 베런트는, 옮긴이의 말처럼, 제임스 조이스만의 ‘더블린’(더블리너)이나 찰스 디킨스의 ‘런던’(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자신만의 ‘서배너’이미지를 구축한 셈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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