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 여행’. 조금이라도 더 찬 곳으로 떠나려는 피서객들에게는 무덥게만 느껴질 테마다. 그러나 올 여름처럼 비가 끝없이 내리고, 그래서 인기 피서지들이 물난리와 복구 작업으로 골치를 앓고 있고, ‘룰루랄라’ 바닷가를 뛰어다닐 분위기가 아니라면 시도해 볼 만하다. 자타공인 ‘목욕의 여왕’인 어머니는 내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목욕탕에 데리고 다니셨다.
적어도 1주일에 한 두 번은 왕래를 하셨으니 내가 30년 넘게 탕에 몸을 담근 시간만 해도 꽤 길겠다. 그래서인지 여행지에 도착하면, 근처의 ‘물 좋은’ 목욕탕을 먼저 살피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좋은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고 피부가 매끈해지며 혈액순환이 좋아져 다이어트의 효과까지 있으니, 이제는 나와 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일본으로의 온천 여행이 패키지 상품으로 개발되면서 대한민국의 물 좋은 온천들이 다소 ‘올드’하다는 인상을 입기 시작한 것.
옛날 부모들은 신혼 여행지로도 온천이 최고라 꼽곤 했는데, 그 은밀하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올 여름, 찌뿌둥한 몸을 호소하는 가족끼리 연인끼리 1박 2일의 ‘국내’ 온천 여행을 계획해 보면 어떨까? 여기에 더해지는 ‘맛’까지 한 방에 제안해 보는 이번 여행지는 바로 충남 예산이다.
●소고기
얼마 전 충남의 대표 광역 브랜드를 붙인 한우가 출시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었는데, 예산의 고기 맛은 역시 빼어나다. 온천 호텔들이 밀집된 도로변에 위치한 ‘황토마당(041-338-6363)’도 한우 암소 생고기만 취급을 하는데, 괜찮다.
‘맛집’에 관한 한 사전 조사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본능적으로 끌리는 곳에서 밥을 먹는다. 나를 끄는 요소는 대략 단순한 메뉴, 주인장의 분위기 그리고 간판에서 풍기는 내공이다. 이 집은 반신반의 하면서 들어갔는데(저녁 늦게 도착했더니 문을 연 식당이 거의 없었다), 메뉴를 보니 소고기가 부위별로, 그리고 갈비탕, 내장탕, 선지국이 있다.
‘음, 소고기에 자신이 있나 보네’ 하는 생각에 일단은 마음을 놓고, 600g짜리 ‘소고기 특수 부위(5만4,000원)’에 소주 한 병을 주문한다. 생고기를 굽는 일은 늘 남편의 몫인데, 이번에도 부위별로 흐름(!)을 조절해가며 숯불 위에 올려놓는다. 안창, 채끝, 갈빗살, 혀 등을 돌아가며 먹는 그 맛은 서울서 달려 온 두 시간 여를 하나도 아깝지 않게 해준다.
고기의 색이 유난히 선명하고 냄새도 야생적인 것이 정말 ‘남의 살’ 씹는 느낌을 팍팍 느끼게 한다. 뽀얗게 끓인 내장탕에는 내장 건더기가 듬뿍 들었는데, 너무 깨끗이 손질 되어 있어서 잡내가 하나도 안 나고 마냥 쫄깃하다. 고기를 다 먹은 다음 그대로 불 위에 올려 양념을 조금 풀었더니 술안주로 그만.
●불닭 도시락
서울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좋은 공기 때문인지, 숙취도 거의 없이 일찍 잠에서 깼다. 벌써 여행의 이틀째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바빠지는데, 일단 예산 옆 홍성군의 이름난 ‘용봉산’으로 출발했다. 차로 10여 분을 달리니 바로 ‘용봉산’ 표지판이 보였지만, 아침을 해결할 목적으로 군청 근처의 ‘조양문’ 쪽으로 가 보았다.
버스 터미널과 역이 인접해서인지 고만고만한 밥집들이 여럿 있다. ‘아침밥 됩니다.’라고 써있는 식당에 들어 백반 2인분으로 기운을 차렸다. 밴댕이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예산의 ‘또순이 식당’을 찾으라고 귀띔해준다. 수덕사에 자주 가는 내게 택시 기사분들께서 여러 차례 ‘강추’하신 곳이다. 안타깝게도 전화번호를 못 챙겼지만 ‘덕산면’에서 지나가는 기사분께 여쭈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챙겨 먹고 산으로 향한다. 높이 381m남짓한 용봉산은 아이들을 데리고도 충분히 오를 만하다. 산 곳곳에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미리 ‘예산 고기’에 쌈 야채랑 버너 정도를 챙기면 하산 길에 기분 좋은 점심밥을 먹을 수 있겠다. 하긴, 꼭 고기가 아니어도 산을 타고 난 직후에는 모두 맛있으니 홍성 고추를 툭툭 찢어 넣어 끓인 라면에 커피 믹스로 입가심을 해도 꿀맛일 게다.
취사가 불가능한 산에 갈 때에는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면 요긴한데, 이때 메뉴는 최대한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탄수화물에 단백질 그리고 소화를 돕는 야채가 조금 있으면 그만. 날씨가 더울수록 부패를 염두에 두어 양념해서 볶은 요리나 식초를 많이 쓰는 요리를 위주로 한다.
나의 등산 도시락은 입맛을 매콤하게 살려주는 불닭 스타일의 닭볶음에 다진 야채랑 식초, 소금, 설탕, 깨, 참기름을 넣고 꽁꽁 뭉쳐서 만드는 주먹밥 정도. 여기에 요즘 한창 유행인 쌈무 혹은 피클처럼 초절임한 깻잎, 마늘쫑을 곁들이면 소화에도 문제없다.
우리 시어머님은 마늘쫑을 만들 때에 초물과 정종을 섞어서 부으시는데, 마늘의 냄새가 완벽하게 제거되고 굉장히 아작거리면서 깔끔한 맛이 된다. 평소에 만들어두었다가 산에 갈 때 작은 병에 담아가면 인기 꽤나 끄는 반찬이다.
불닭 스타일의 닭볶음은 한입 크기로 썬 닭 안심이나 가슴살을 불닭처럼 매콤하게 볶아서 한 김을 빼고 담는 것인데, 매운 양념은 식어도 맛있어 도시락에 적당하다. 산에 다녀보면 많은 이들이 고추장을 넣은 양푼 비빔밥이나 고추장을 찍은 풋고추를 즐겨 드시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나. 그만큼 입맛을 당겨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 매운맛이라는 말씀!
●수덕사 앞 산채
다시 예산으로 돌아와 산에서 흘린 땀을 온천물에 씻어보자. 1910년대에 문을 연 온천부터 최신 시설을 갖춘 스파겸 물놀이 파크까지 그 선택의 폭은 다양하다. 섭씨 45도의 온천수를 데우지도 식히지도 않는 채로 받는 열탕과 노천탕을 갖춘 곳도 있는데, 5,500원의 이용료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온천욕을 마치고 나와서 배가 고프면 수덕사 근처에 즐비한 산채집들을 뒤져보자. 일본의 온천이라면 풀 먹인 유카다 가운을 입고 정갈한 상차림의 가이세키 요리를 맛 볼 수 있겠지만, 비행기를 안타도 되고 경비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예산의 온천을 즐긴 후에는 절집 앞에서 먹는 산채로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수덕사 바로 앞에 있던 ‘수덕 여관’은 옛날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쉼터 같은 곳이었다지만 지금은 쓸쓸한 흔적만 남아 있어서 안타깝다. 마주 보이는 ‘덕수 여인숙’은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문 열린 채로 그 자리에 아직 있다. 수덕사를 찾는 지친 영혼들을 2만 원이라는 괜찮은 방값에 재워주는 곳이다.
그 옆에 있는 ‘수덕식당(041-337-6019)’은 나의 오랜 단골인데, 사실 주인장을 정식으로 뵌 적은 없다. 갈 때마다 그냥 아주머님 한 두 분이 계시기는 한데, 지난봄에 계셨던 그 분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들르는 곳이다. 작은 방마다 뒤뜰로 문을 내어 여름에는 퍽 운치가 있다.
물론, ‘수덕’이라는 이름에서 풍겨 나오는 고고한 분위기도 한 몫을 하겠지만. 대표메뉴는 특별할 것 없는 산채와 더덕, 찹쌀 동동주와 도토리 빈대떡 등이다. 결혼 전부터 우리 부부가 자주 들르던 ‘맨 끝 방’은 사실 ‘맛’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서 더 특별하다.
/ 글 박재은ㆍ사진 임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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