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2> 그렉 차일드(1957~)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2> 그렉 차일드(1957~)

입력
2006.07.26 23:55
0 0

미국의 요세미티나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혹은 프랑스의 샤모니에 가면 해괴한 몰골을 한 기이한 젊은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행색은 거지꼴이되 눈빛만은 형형하고, 가진 것은 없되 등반장비만은 짱짱하게 갖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따금씩 호텔 주방 뒷문으로 들어가 남들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구걸하기도 하고, 캠핑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찌그러진 맥주 캔들을 주워 모으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가끔 길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세일즈할 때 그들이 내건 ‘광고문안’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지며 기가 질린다. ‘엘캡 노즈 선등 가이드 가능. 피치당 2달러 50센트.’

이런 친구들을 ‘클라이밍 범(climbing bum)'이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 옮기려 해도 꼭 맞아떨어지는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대략 ‘건달산악인’ 혹은 ‘등반부랑아’ 정도가 엇비슷한 표현인 것 같은데 본래 의미의 온전한 느낌을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클라이밍 범은 스스로를 다운시프트(down shiftㆍ경제적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개인적 삶의 여유를 찾으려는 행위나 그런 경향)한 자발적 거지이고, 기성세대 혹은 기존의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전복자이며, 무엇보다도 빼어난 솜씨를 갖춘 ‘전업등반가’를 뜻한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일만 하고, 여타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며, 오직 등반의 즐거움을 좇아 전세계의 바위와 빙벽들을 떠돌아다닌다. 이를테면 가난한 히피 스타일의 전업 등반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이밍 범과 처음 마주쳤을 때는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삐쩍 말랐지만 오직 근육질로만 이루어진 몸매, 형형색색의 누더기로 기운 옷과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 그리고 마치 영광의 훈장인양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해괴한 등반 장비들. 그들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회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들 같은 느낌도 들어 가슴 한편이 짠해지기 마련이다. 열정이 도를 넘으면 광신이 된다. 얼마나 산에 미치면 저렇게 될까 싶어 겁이 덜컥 나기도 한다. 그런데 틴에이저가 되자마자 자신의 장래 희망을 클라이밍 범이 되는 것으로 확정지은 사내도 있다. 바로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토털 클라이머 그렉 차일드(49)다.

호주 최고의 암벽등반 대상지는 시드니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블루마운틴이다. 시드니에서 태어난 그렉 차일드가 이 산의 거대한 사암질 암벽에 달라붙기 시작한 것은 13세가 되던 해인 1970년부터. 제대로 된 스승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은 동네의 코흘리개 친구들과 더불어 마구잡이식으로 시작한 암벽등반이었지만 그 즐거움만은 소년의 넋을 홀리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차일드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비밀스러운 음모를 키우고 있었다. 호주의 법률상 16세가 되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 그때가 되면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떠나 ‘클라이밍 범’이 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1973년에 학교를 자퇴하고 여름 동안 일해서 번 돈 200달러를 가지고 집을 떠나 블루마운틴의 한 동굴에 거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날씨가 나쁘거나 맛있는 음식이 그리울 때는 가끔 집에 들렀지만.”

10대 후반의 남은 삶 전부를 호주의 암벽에 송두리째 바친 그는 이제 더 높고 험한 바위를 찾아 세상을 주유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의 대상지는 물론 미국의 요세미티다. 차일드는 그곳에서 1975년에 초등된 이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해 전설 속에 파묻혀 버린 ‘퍼시픽 오션 월’을 단 일주일만에 돌파해 냄으로써 요세미티에 죽치고 있던 전세계의 클라이밍 범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차일드가 스무살이 되던 1977년의 일이다. 어느 사회에나 그들 나름대로의 네트워크가 있다. 등반부랑아들의 히피촌에서 스타로 떠오른 그는 이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세계암장순례를 떠난다. 같은 해에 영국으로 등반여행을 떠났다가 더그 스코트를 만나 알파인 클라이밍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차일드에게 커다란 행운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히말라야 등반가인 더그 스코트는 호주 출신의 이 겁 없는 암벽등반가 청년을 몹시도 아껴주었다. 그들이 함께 등반을 할 때 빙설벽에서는 스코트가 앞장을 섰고 암벽구간에서는 차일드가 앞장을 섰다고 하니 최상의 파트너십이 아닐 수 없다. 차일드의 첫 번째 히말라야 등반 대상지는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험봉 쉬블링(6,543m)이었다. 그는 스코트와 함께 12번의 연속 비박을 감행한 끝에 기어코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특히 최후의 3일 동안에는 식량과 연료가 모두 동이 나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차일드는 당시 스코트가 던진 말 한 마디를 평생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배가 불러 가지고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

이제 되바라진 등반부랑아는 장엄한 히말라야 등반가로 변신했다. 차일드는 이후 롭상 스파이어(5,705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룸4봉(7,925m) 북서릉 등을 오르며 히말라야 거벽 등반계의 최연소 엘리트로 자리를 잡았지만, 자신의 본령인 암벽등반이나 거벽등반에서도 끝없는 신기록들을 갱신하며 등반세계의 지평을 넓혀갔다. 그렉 차일드 같은 스타일을 ‘올라운드 플레이어’ 혹은 ‘토털 클라이머’라고 부른다. 자칫 편협한 삶을 살아가기 쉬운 클라이밍 범에서 세상의 모든 산과 모든 등반형태를 마스터하여 제 것으로 만들어간 그의 삶이 더 없이 호쾌하면서도 눈부시다. 산악문학작가

■ 제도교육 공백 넘어… 산악문학가로도 명성

그렉 차일드는 제도교육을 거부하여 16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학교를 자퇴한 반항아였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일 자체를 게을리 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그가 출간한 산악문학 저서들을 보면 그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문장 그리고 풍부한 감수성에 압도당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희박한 공기'(1987)는 미국산악회 문학상을 수상했고, 클라이밍 범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한 '렛지에서 보내온 엽서들'(1998)은 캐나다 밴프산악서적제에서 '존 화이트 상'을 수상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그의 내면적 독백들이 차분하게 기술되어 있는 '복잡한 감정'(1993)이다. 이 책 안에서 그가 브로드피크 등반 도중 자신의 코 앞에서 숨져간 친구를 담담히 회고하는 장면을 읽을 때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 "나는 갑자기 산이 싫어졌다. 미웠다. 나는 자꾸 되뇌었다. 이렇게까지 할 가치는 없어! 이럴 필요까진 없다구!"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 말로 옮겨 국내에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다.

가장 최근의 저서인 '경계선 너머'(2002)는 2000년 여름, 키르키즈스탄의 악수 산군에서 거벽등반 도중 갑자기 총격 세례를 받고 이슬람 무장단체에 강제 피랍되었던 자신의 극적 체험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당시 그를 포함한 4명의 산악인들은 중무장한 이슬람 반군들에게 피랍되어 6일 동안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다가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과정의 묘사가 마치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