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조직이나 집단엔 독특한 성향ㆍ취향ㆍ기질 등으로 이루어진 습속이 있기 마련이다. 이 습속은 그 조직ㆍ집단의 대외경쟁력이나 교섭력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공공적 논의의 마당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가수들을 보자. 가수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집단으로서의 대외교섭력이 약해 자신들의 권익을 잘 챙기지 못하는 편이다. 왜 대외교섭력이 약할까? 가수들의 작업 방식 때문이다.
가수들은 한 곳에 모두 모이기가 힘들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각자 여기저기 출연 장소를 계속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단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그런 조건은 가수들의 습속으로까지 발전해 개인 또는 소속 기획사 위주의 행태를 보이게 된다.
● 낙후된 독서문화 책임 어디에
반면 늘 동고동락하며 집단작업을 해야 하는 영화인들은 평소 단결 없인 일을 진행하기조차 힘들다. 단결이 몸에 배어있다고나 할까.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그들의 투쟁을 보라. 감동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로 치열하고 일사불란하다.
이런 이치에 수긍할 수 있다면, 우리의 낙후된 독서문화는 출판인들의 독특한 습속에 큰 책임이 있다는 데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겠다. 오래전부터 TV가 독서문화 진흥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을 해온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출판인들의 '점잖음'이었다.
'독서문화 진흥'과 '방송의 사회적 책임'을 부르짖는 것만큼 좋은 명분이 어디에 있으랴. 모든 출판인들이 들고 일어나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책을 매개로 한 다양한 장르를 구상하면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난립'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연예인들마다 앞다투어 책을 읽어야 하는 행복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얼마든지 꿈꿔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출판인들은 방송사들의 편성권을 존중하는 걸 넘어서 신성시했다. 방송사들을 믿기로 했나 보다. 하지만 방송사 내부 조직논리에만 맡겨 놓으면 독서 관련 프로그램은 사라지거나 위축되게 돼 있다.
그건 어느 나라에서건 마찬가지다. 방송과 출판의 코드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선의의 외부 압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편성시간에서부터 제작비 지원에 이르기까지 우대를 받아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고사당한다.
'TV 책을 말하다'가 독서 관련 간판 프로그램으로 버티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방송 공영성의 최후의 보루라 할 만하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TV는 책을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출판인들은 내심 격려는 할 망정 공개적으로 전 방송계에 자극을 줄 생각은 없나 보다. 정 안되면 책을 박대하는 방송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해보는 것도 좋을 텐데 말이다.
왜 출판인들은 점잖을까? 물론 출판계에도 상업주의 위주의 '베스트셀러 추구파'가 있기 때문에 다 점잖다고 말할 순 없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주로 공공 문제를 다루는 인문ㆍ사회과학 출판인들이다.
이들의 습속을 관찰해보면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이 발견된다. 평균적으로 말해서 이들은 대학교수 집단보다 더 학구적이다. 이들은 임용ㆍ승진ㆍ업적평가 등 '정치'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교수보다 더 순수하다. 정말 즐거워서 공부하며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 출판인들은 왜 단결 못하나
그래서인지 이들은 방송사는 물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일조차 꺼려 한다. 그걸 천박하다고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안타깝다. 엄청나게 재미있는 오락의 홍수 속에서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책을 말하려고 애를 쓰는 TV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조만간 인문ㆍ사회과학 출판사들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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