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맺은 인연(內緣)’이 애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비뚤어진 복수심은 내연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별을 바라는 내연녀의 가족을 볼모로 인질극을 벌이는가 하면, 교제를 반대하는 내연녀의 언니를 살해한 사건도 있다.
심지어 1월 서울 신당동에선 내연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자 그 남자의 8세 된 딸과 부인 등 일가족 3명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용의자(44)는 “배신을 당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전문가들은 “내연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범죄 외엔 탈출구가 없다”고 지적한다.
사망자 8명, 12명의 부상자를 낸 19일 서울 잠실의 고시원 화재 참사도 뒤틀린 내연관계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참극이었다. 경찰 조사결과 방화 용의자는 고시원건물 지하1층 P노래방 주인 정모(52)씨였다. 그는 “같은 건물 3층 고시원에 사는 최모(39ㆍ여)씨와 사귀고 있는데 잘 만나주지 않는데다 장사도 잘 되지 않아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다.
경찰에 따르면 1994년 이혼한 정씨는 지난해 7월부터 최씨를 사귀게 됐고 1,500여만원을 빌려주는 사이로 발전했다. 하지만 최씨는 화재가 나기(19일) 보름 전께부터 “만나주지 않으면 돈을 더 빌려줄 거라 여겨” 정씨를 피했다.
마침 노래방을 처분하고 이 돈으로 최씨의 환심을 사려했던 정씨는 일이 풀리지 않자 사건 전날 이따금씩 만나 온 전처와 술을 마셨다. 노래방으로 돌아온 정씨는 최씨에게 “만나달라”며 3차례 전화를 했고 최씨가 이를 거절하자 19일 오후 3시50분께 노래방 소파에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밖으로 빠져 나왔다.
정씨는 이후 최씨 등 2명을 구조하는 이해 못할 행동까지 했다. 그는 “화풀이였지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후회했지만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였다.
전문가들은 내연관계의 특성상 의사소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높다고 지적했다. 행복찾기신경정신과의원 이창한 원장은 “내연관계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결속력이 각별한데 일단 배신을 당하거나 관계가 어긋나면 복수심을 자제하지 못한다”며 “특히 무의식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돼 범행 대상도 불특정적이고 광범위하다”고 말했다.
내연관계의 확산도 문제다. 한 설문조사에선 기혼녀 10명 중 4명이 ‘내연남이 있다’고 답했다. TV드라마 등이 내연관계를 부추기고 전국엔 은밀한 만남을 보장하는 4만여개의 모텔이 성업 중이다. 서울의 한 모텔 주인은 “10커플 중 4~5커플은 누가 봐도 내연관계”라고 말했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23일 정씨에 대해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정씨는 영장실질심사마저 포기했다. 경찰은 또 고시원 운영자와 건물주가 건축법과 소방법 등을 위반했을 것으로 보고 입건 여부를 검토 중이다.
한편 화재사건의 희생자 8명 중 7명의 발인이 이날 오전 서울 경찰병원 등에서 열렸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운전연수 강사를 하며 외따로 고시원에 살아야 했던 고(故) 손경모(42)씨의 발인엔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쌍둥이 자매(9)가 참석하지 않아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나머지 1명의 발인은 21일 치러졌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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