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저녁 7시께 서울 노량진 학원가.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하나 둘씩 몰려든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털어내기 위한 술자리 모임을 위해서가 아니다. 공기업ㆍ교사ㆍ공무원시험 등을 준비 중인 이른바 ‘직장인 공시족(公試族)’이다.
불과 4~5년 전만해도 이 동네는 대입학원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취업 재수생에다 직장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취업 학원들이 더 많아졌다. 공무원시험 전문인 A학원 관계자는 “직장인들이 대거 몰리면서 이곳 학원들이 경쟁적으로 공시족을 위한 야간ㆍ주말반 증설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승진도, 월급 좀더 받는 것도 싫다. 살아 남으려고 아등바등 사는 데도 지쳤다. 그저 스트레스 덜 받고 가정에 충실하며, 가늘고 길게 직장 생활하는 게 최고다. 자식 결혼시킬 때 사돈에게 내밀 명함 한 장 없는 백수 신세라면 얼마나 처량하겠는가.’
냉면 가락처럼 가늘고 길며 질기게 살려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지금 당장은 폼도 나고 고임금을 받더라도 언제 퇴출 될지 모르는 직장에 다니기 보다는, 임금이 낮더라도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공기업ㆍ교사ㆍ공무원 등을 선호하는 것이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국내 주요 공기업의 신입사원 채용현황을 분석한 결과, 한국전력공사는 올해 상반기 채용한 신입사원 140명 중 38명이 삼성 등 대기업 출신이었다. 한국토지공사는 2003년 이후 채용한 신입사원 849명 가운데 103명이 삼성ㆍLG 등 대기업과 국민은행 등 금융회사에서 옮겨 왔다. 대한주택공사도 2004년 이후 입사자 652명 중 절반에 가까운 300명이 직장인 출신이었고, 특히 삼성ㆍ현대ㆍLGㆍSK 등 4대 그룹 출신만 22명에 달했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지난해 19명 모집에 4,809명이 응시(경쟁률 253대1) 했는데, 이 중 30세 이상이 672명(14%)에 달했다. 또 한국증권선물거래소는 작년에 뽑은 신입사원 13명 가운데 8명이 직장인이었다.
올해 2월 변호사 2명 공채 때도 지원자 40여명이 대부분 기업체나 로펌에 소속된 변호사들이었다. 증권거래소 인사팀 관계자는 “아무래도 공기업이 스트레스가 적은데다 고용 안정성도 상대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건 공기업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겐 승진이 오히려 스트레스다. 모 국책은행의 김모(48) 부장은 “1급 부장으로 진급해 일정 기간 내 임원 승진을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한다”며 “그저 가늘고 길게 살고싶을 뿐, 진급이 결코 기쁘지 않다”고 말했다. ‘철밥통’으로 불리는 공무원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행정고시 출신 고위 공직자들의 퇴출 연령이 빨라지면서 행시 경쟁률은 낮아지고, 7ㆍ9급 공무원시험 경쟁률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2000년 60대1이던 행시 경쟁률은 작년 41대1로 떨어진 반면, 7급은 79대 1에서 119대 1로, 9급은 37대 1에서 84대 1로 높아졌다. ‘가늘고 길게’의 대명사인 교사 임용고시 경쟁률도 2002년 4.3대1에서 올해 14대1로 3배 이상 높아졌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사회 안전망이 취약해 노후보장이 제대로 안 되는데다 한창 일할 나이의 선배나 동료들이 수시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다 보니, 직장인들의 안정성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인다”면서도 “고령화와 맞물려 사회의 역동성이 급격히 떨어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유병률·안형영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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