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원로 국제정치학자 한 분이 계신다. 매우 보수적 성향의 학자로 북한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그러나 반북적인 자신의 정치성향과는 별개로 벼랑 끝 전술로 상징되는 북한의 외교술은 국제정치학자로서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 있다.
사실 클린턴 정부와 김영삼 정부를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벌려 경수로 발전소 지원 등을 얻어냈듯이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그동안 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공을 거둬왔다.
● 또 다른 '치킨 게임' 북한 미사일
그러나 북한의 비밀구좌에 대한 동결조치 등 미국의 압박에 대한 벼랑 끝 대응이라고 볼 수 있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같은 불패의 신화가 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전망을 하게 한다.
즉 북한이 미사일 발사라는 핵폭탄급 카드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끄떡도 하고 있지 않다. 국제여론 역시 냉랭하기 짝이 없어 북한의 고립만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마지막 믿는 구석이라고 볼 수 있는 노무현 정부 역시 국내의 여론 악화에 따라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을 선언하는 등 남북관계 역시 차가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북한이 막판에 또 한 차례 극적인 카드를 들고 나와 현재의 수세를 반전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라면 그간의 불패 신화는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 칼럼에도 한 두 차례 소개한 바 있지만 흔히들 국제정치 현상을 '치킨 게임'이라는 것으로 설명한다. 치킨이라는 영어 단어가 가진 겁쟁이라는 속어적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이 게임은 깡패들이 내공을 겨룰 때 차가 한 대밖에 못 다니는 낭떠러지에서 차를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정면충돌을 우려해 차의 브레이크를 먼저 밟아 차를 세우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이 치킨게임처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려와 공멸을 두려워한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게임의 법칙, 정확히 말해 게임의 전제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라 공멸의 가능성을 계산해 양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처럼 비이성적으로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경우 이성적으로 정면충돌의 결과를 계산하는 측이 양보를 할 수밖에 되어 있다.
이밖에 중요한 것은 게임에 임하는 행위자들이 게임에 걸고 있는 판돈, 그리고 비용과 고통민감도의 비대칭성이다. 북한이 그동안 미국과의 치킨게임에서, 그리고 또 다른 소국인 베트남이 월남전에서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판돈이라는 면에서 북한과 베트남은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비용과 고통민감도의 비대칭성도 문제다.
북한과 베트남은 치킨게임에서 반신불수가 된다고 해도 버티지만 미국은 국내여론 때문에 팔 하나만 잘린다고 해도 버티기가 어렵다. 베트남전에서 베트남은 인구의 상당비율을 잃고도 버텼지만 미국은 사상자가 늘어나자 반전 여론이 들끓어 두 손을 들어야 했다.
문제는 이 같은 게임의 전제들이 최근 들어 변한 것 같다는 점이다. 9ㆍ11 테러의 충격을 겪으면서 미국 국민들도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비용과 고통민감도가 둔화된 것이다.
● 걱정스런 김정일-부시 스타일
또 부시 대통령 역시 공멸의 가능성을 우려해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기보다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도 북한의 비교우위가 힘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별 일이야 있겠냐마는, 상대가 하도 상대들이라 김정일과 부시의 벼랑 끝 치킨게임이 예기치 않은 파국을 낳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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