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판결에 논리적 비약이 있다. 검찰이 그 부분을 메워주기 기대한다.”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 헐값매각 사건 항소심을 맡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이상훈)가 20일 이례적으로 검찰 수사의 미흡함을 질타하며 추가 수사를 요구했다.
이로써 검찰은 삼성그룹 오너 일가를 소환 조사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하지만 검찰이 오너 일가의 지시나 공모 여부를 밝혀내지 못할 경우 1심과 달리 관련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도 있어 그만큼 부담도 지게 됐다.
이 부장판사는 이날 허태학 에버랜드 전 사장과 박노빈 사장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CB 발행과 주주들의 권한 포기 과정에서 피고인들과 주주 사이에 공모가 있었는지 여부가 밝혀져야 하지만 이에 대한 입증이 없다”며 석명권(釋明權)을 행사했다.
석명권은 재판장이 사건의 진상이 애매하다고 판단할 경우 당사자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검사 등에게 입증을 촉구할 수 있도록 한 형사소송규칙상의 권한이다. 따라서 재판부는 공판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은 ‘석명권’까지 꺼내는 강수로 허 전 사장 등의 배임 혐의와 삼성 오너 일가의 공모 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할 것을 검찰에 요구한 셈이다.
이 부장판사는 “검찰은 피고인들이 CB가 이재용씨 등에게 저가 배정되는 과정에서 주주들과 공모했다고 주장하지만 두 피고인이 CB의 실권 과정이나 배정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실권한 주주들과 어떤 의사 교환을 했는지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지금 판결한다면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형식적 판단이 될 염려가 있다”며 “CB 배정의 전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를 분명히 한 다음 선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특히 검찰이 “CB 실권 및 배정 과정에 내부적으로 공모가 있었다”고 공소 사실을 반복하자 “1심 때부터 하던 주장을 되풀이하거나 동문서답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다음 공판이 예정된 다음달 24일까지 재판부의 요구 사항을 입증하거나 현재의 공소 사실을 계속 주장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검찰이 재판부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삼성그룹 오너 일가에 대한 조사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CB 발행이 이뤄진 지 이미 10년이나 지난 데다 중앙일보, 제일모직 등 주주들이 어떤 결정 과정을 거쳐 CB를 포기했는지 밝히라는 재판부의 요구가 상당히 구체적인 점을 감안하면 검찰이 주주 조사를 통해 추가적인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공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요구하는 내용은 사실상 수사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재판부가 무죄 선고의 심증을 갖고 정지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이 입증 책임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법원으로서는 ‘무죄 선고’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명분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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