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제헌절 전후로 두 건의 법조계 비리가 터져 나왔다. 군산지원의 판사들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업자의 뒤를 보아주고,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비롯한 전현직 판검사 25명이 법조브로커 모씨의 수완에 걸려들었다는 소식이다. 나라가 부끄러운 일이다.
● 나라가 부끄러운 법조 비리
이럴 때 생각나는 분이 효봉 스님이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은 일제시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법관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내린 사형언도가 오심임이 밝혀지자 산으로 들어가 선승이 되었다. 이런 특이한 출가의 내력을 곱씹어보면 판사는 원래 선사다운 면이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세상 사람들의 아귀다툼에 공정하게 개입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이익과 욕망에 초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판사는 말 그대로 판단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일반적으로 판단은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원리에서 출발하여 사태로 향하는 경우 이를 규정적 판단이라 한다. 여기서 판단의 목적은 사태를 해석하거나 규정하는 데 있다. 이런 규정은 이미 주어진 개념, 법칙, 역사적 사례 등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저울로 사물의 경중을 비교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판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법률을 잣대삼아 사안의 유죄 여부나 죗값의 크기를 결정하는 판단이다.
반면 기존의 법률로는 해석하기 어렵고 게다가 법률의 본성이나 그 존재이유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희귀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법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이 일어날 때 우리의 판단은 앞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방향을 취한다.
어떤 부정할 수 없는 경험적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이나 추론을 고안해야 할 의무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최종적 결단은 어떤 보류와 모색 끝에 내려지므로 반성적 판단이라 부른다.
판사가 매번의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시민 전체를 대신해서 판결을 위임받은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률 자체의 원천적 결함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그 결함은 대충 둘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법률은 모든 곳에서 한결같은 것(일반적인 것)이지만, 법률로 규정해야 할 경험적 사안의 내용은 언제나 한결같지 않은 것(특수한 것)임을 생각하자. 판사는 규정적으로 판단할 경우에도 법률적 추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안의 독특한 특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법률의 형식적 추상성과 사태의 내용적 특수성 사이 못지않은 또 하나의 괴리는 법률과 윤리 사이의 괴리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법률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이 두 판단이 서로 다르고 심지어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그 갈등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법률의 기원은 윤리에 있고, 윤리의 기원은 바람직한 공동체의 질서를 조형하는 데 있다. 판사는 기존의 법률적 추론이나 판례에 만족하지 못하여 반성적인 판단에 임할 때는 자신의 결정이 윤리적 감정을 명료하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망각된 도덕 감정을 일깨우고 발전시키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 판사는 선사와 같아야
효봉 스님을 돌아보면서 판사는 선사와 같아야 한다고 말할 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판사는 경우에 따라 윤리의식을 자극하고 선도하는 교육자여야 할 때가 있고, 그럴수록 자신의 역할 앞에 겸손해야 한다. 효봉 스님은 '상당법어(上堂法語)'라는 선시에서 "그 누가 나에게 사자좌를 맡겼건만/ 부끄럽다, 나는 오늘 여우 울음을 울었네"라고 적었다.
구도자의 길이란 결국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는 데서 시작해서 또 거기서 일단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판사가 판사로서 거듭나는 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상환ㆍ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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