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원망하는 것도 지쳤어. 그렇다고 넋만 놓고 있을 수도 없잖아….”
더디지만 천재(天災)에 맞선 인화(人和)의 숨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마가 할퀸 강원과 수도권 일대는 18일에도 무심한 하늘이 쉴새 없이 비를 뿌려댔다. 벌써 나흘째다. 복구의 손길은 대자연의 힘 앞에 그저 옹색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흙 한 삽, 물 한 동이를 퍼내는 땀방울은 그칠 줄 모른다.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이날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전날 밤부터 또다시 거센 빗줄기가 몰아쳤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17일 오후 늦게 말끔히 치웠던 도로는 여지없이 흙 범벅, 흙탕물이 됐다. 집 앞에 모랫둑을 쌓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았던 주민들은 다시 집 지붕까지 물이 차오르자 모두 흩어졌다. 마을 곳곳에 처박혔던 자동차는 나뒹굴었고 마을 남북을 가로지르는 오대천은 읍내를 집어삼킬 듯 검은 혀를 날름거렸다.
진부중고 체육관에서 대피 중이던 주민 90여명은 몸서리를 쳤다. 이진상(68)씨는 “또 비냐, 지긋지긋하다.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 달리 바라는 것도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창군 일대 고립지역도 6개 마을(500명)에서 10개 마을(1,500명)로 늘었다.
활기를 띠던 복구작업도 주춤할 수밖에 없다. 포클레인 기사 김인기(54)씨는 “어제 다 마친 일을 다시 할 생각을 하니 맥이 빠진다”고 했다. 진부면과 정선면을 잇는 59번 국도를 복구하기 위해 흙더미를 쏟아 붓고 어렵사리 임시로 차량통행을 재개했지만 계속된 비로 도로가 다시 웅덩이로 변하면서 트럭만 간신히 오갔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주민과 경찰 군인 등 240여명은 비를 맞아가면서도 복구를 위해 한발 한발 전진했다. 사방에 널린 흙더미와 나무더미를 치우기도 역부족이지만 물줄기를 새로 트고 끊어진 도로를 잇기 위해 포클레인 30대를 투입했다.
악천후지만 헬기도 떴다. 먹을 것, 마실 것 없어 고통 받는 고립지역을 위한 용감한 비행이었다. 이날 오후 3시께 2대의 산림청 헬기가 구호품을 싣고 날아올랐다.
오전에는 궂은 날씨 탓에 이륙허가가 나지 않았다. 산림항공관리소 채승호(34) 대원은 “어제 20회 작업을 했다. 그래도 부족하다. 우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주민이 있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며 헬기에 올랐다. 소방헬기도 1대 떠 주민들 구조에 나섰다.
비는 무정했지만 주민들은 헬기가 실어오는 고립지역 주민들의 구조소식을 접하면서 힘을 얻고 있다. 진부면 관계자는 “주민들의 복구 의지가 강하다”며 “3~4일만 지나면 고립지역까지 임시로 차량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 인제군 덕산리 일대도 중장비 6대와 장병 400여명이 빗속에서 복구작업에 매달렸다. 신세 한탄에 빠졌던 주민들도 “한번 해보자”며 힘을 보태면서 복구작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안양천 둑 붕괴로 서울 시내에서 피해가 가장 심했던 영등포구 양평2동 일대도 악몽을 털어내느라 하루종일 분주했다. 한신아파트 상가 입주자 대표 30여명이 정전 때문에 촛불 아래 모여 앉아 대책위원회를 꾸리는 한편 복구작업에도 팔을 걷어 부쳤다. 가장 시급한 것은 끊어진 전기를 복구하는 일이다. 봉사 현장의 삼성자원봉사단 관계자는 “한전에서 임시 변압기를 설치하면 삼성에서 무상으로 케이블을 연결해 각 세대에 전기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부근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모두 나와 기계와 집기 등을 끄집어 내 말리는 등 빗속 사투도 이어졌다. 한국야쿠르트 직원 10여명은 아파트 단지에서 생수 6,000병을 나눠주고, KT는 무료전화를 설치하는 등 도움의 손길도 끊이지 않았다. 방역작업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불만은 가시지 않았다. 상가 주민들은 “이번 사고는 인재(人災)다. 지하철 공사를 맡은 삼성건설은 원인조사를 해야 한다고 할뿐 책임은 피하고 있다”며 “주변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지하철 공사 저지 운동과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벌일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이날 양평2동 침수와 관련해 전문가와 기관에 의뢰해 정확한 사고원인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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