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오 최고위원이 대표로 선출됐다면 한나라당은 짭짤한 ‘전당대회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민중당 사무총장 출신이 보수 야당의 대표가 됐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이다. 보수 편향의 당 색채 교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나라당은 그의 등장으로 상징적 이미지 개선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성을 가졌을지는 의문이다. 강재섭 대표와 이 최고위원은 모두 당내 2인자인 원내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이 최고위원이 강 대표보다 개혁적이어서 그의 원내대표 재임시절 당이 달라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민주화 투쟁경력 등을 들어 자신이 개혁의 적임자라고 주장한 것은 득표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경선이 끝난 지금도 새 지도부를 “수구 보수”로 깎아 내리며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것은 억지다. 그것은 입당 10년이 넘은 이 최고위원에게 색깔 검증을 하겠다고 덤빈 것 만큼 볼썽사납다. 이 최고위원 역시 상당기간 당 지도부에 속해 여러 실책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이 최고위원의 개혁성을 따지려면 배후에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검증대에 세워야 한다. 개혁도 힘이 뒷받침돼야 하고, 이 최고위원이 이 전 시장의 의중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이 전 시장을 대입하면 논란은 복잡해진다. 박근혜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새 지도부를 둘러싼 개혁성 또는 보수편향 논쟁은 그래서 부적절하고 무의미하다. 당 개혁은 세력을 거느린 박 전 대표나 이 전 시장의 강한 의지와 정교한 청사진이 우선돼야 하고, 중장기적으론 끊임없는 내부 투쟁을 통해 당 주도세력이 교체돼야 가능하다. 지금의 당 구조와 역학구도로는 대표 한 사람이 바뀐다고 되지 않는다. 따라서, 새 지도부에 대해 개혁과 거꾸로 간다는 의미로 ‘도로 민정당’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딴 데 있다. 바로 전당대회 과정에서 나타난 당과 후보들의 기회주의다. 10일의 경선 기간 동안 최대 국정 현안인 한미 FTA 협상을 입에 올린 후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땐 2차 협상이 10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돼 격렬한 반대 시위가 계속되던 와중이었다.
북한 미사일 발사문제는 더 가관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대북 규탄에만 열을 올린 후보들은 그렇다 치고, 당은 논란이 됐던 남북 장관급 회담(11일) 개최여부에 대한 입장이 없었다. 그나마 당의 국회 통외통위와 국방위 소속 의원들이 “회담을 열어 분명한 항의의 뜻을 전달하자”는 성명을 냈지만, 회담이 결렬되자 지도부는 “우리는 처음부터 회담에 반대했다”고 딴소리를 했다.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전후해 불거진 두 가지 중대 현안에 대해 입을 닫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3년 반 동안 그랬듯 “어려운 문제는 피하고,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자”는 얌체 심리다. 민감한 사안에 괜히 의견을 냈다가 책임을 지거나 비판 받는 게 싫은 것이다. FTA 문제의 경우 의원들은 사석에서 침을 튀기며 소신을 말한 지 오래지만 당은 통일된 원칙도, 각론도 없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는 한나라당을 향해 “이익집단 같다”고 한 적이 있다. 무책임과 임기응변에서 벗어나 ‘가치집단’을 지향하는 것도 중요한 개혁이다.
유성식 정치부장직대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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