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가려고요?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덕적리 입구를 알리는 푯말 너머엔 길이 없다. 물어 뜯긴 듯 너덜해진 끊어진 아스팔트가 마지막이다. 거센 물결이 갈색 혀를 날름댔다. 산길은 흙이 쓸리고 쓸려 늪처럼 질척거렸다. 무엇보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다. 혹 길을 잃거나 고립되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5시간만 위험을 감수하면 그곳에 사람들이 있다. 구조의 손길을 애타기 기다리는….
18일 오전 9시. 수해 복구작업이 한창인 강원 인제군 인제읍 덕산리에 비에 바짝 절은 배낭을 둘러맨 사람들이 나타났다. 물 난리 전만 해도 차로 10분 거리인 윗마을 덕적리 주민들이다. 그들은 물 넘고 산 넘어 3~5시간을 기다시피 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러 아랫마을로 내려왔다. 생필품을 챙기는 틈틈이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느라 정신이 없다.
덕적리는 나흘째 고립됐다. 길도 전화도 전기도 끊겼다. 구조대원조차 접근이 쉽지 않다. 하지만 덕적리 주민들은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해 그 험한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다. 그들을 따라 덕적리로 가기로 했다. 이틀 전부터 시도했지만 "위험하다,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포기했던 길이다.
30분을 걷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틀간의 복구로 길이 뚫렸던 곳이다. 길 끝에서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쉬지 않고 흙을 쏟아내며 길을 만들고 있지만 굽이치는 계곡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멈칫하더니 덕적리 주민 5명이 이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김태우(33)씨가 "직선 거리는 30m밖에 안 되는데…. 별 수 있나요. 돌아갈 수 밖에…."라며 앞장섰다. 그는 당뇨에 합병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엎고 내려올 수 없어 전날 홀로 덕산리에 들어왔다. 어머니를 위한 약과 며칠 분의 식량을 챙겨 올라가는 중이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줄기가 빗줄기보다 더 몸을 젖게 할 무렵, 계곡이 나타났다.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가재도구, 쇠파이프, 나뒹구는 바위까지 어디다 발을 딛어야 할지 모르는 폐허였다. 30분을 숫제 기어가야 했다. 누군가 "이런 길로 아이나 노인을 데리고 오는 건 불가능하죠"라고 했다. 간간이 쓸려가다 만 축사와 집의 형체가 눈에 띄웠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개와 오리들이 구슬프게 울었다.
벌써 3시간째 숨이 목까지 차오를 즈음 마을회관이 보였다. 그 위 마을까지 오르는 건 무리다. 말이 회관이지 실내는 쾌쾌한 냄새가 떠도는 음습한 공간이었다. 노인과 아이 20여명이 여기저기 탈진한 채 누워있다. 먹을 것을 구해오는 마을 장년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지만 얼굴엔 핏기 하나 없다. 김동순(62) 할머니는 아들인 김태우씨 손을 잡더니 "무사히 와줬네, 고마워. 고마워"를 연발했다.
마을회관 주변엔 연료탱크 귀퉁이와 여물 가마솥이 나뒹굴었다. 베개도 보였다. 김용헌(31)씨는 "올라와 보니 어때요? 그 위험한 길을 뚫고 저라도 식량을 날라주지 않으면 감자와 취나물로 연명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마을을 내려오는 길은 더 힘들고 팍팍했다. 장년들이 아랫마을에서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나누는 할머니의 바짝 마른 검은 손이 눈에 아른거렸다. 길이 뚫리지 않는 한 덕적리 장년들의 위험한 산행은 계속되고, 노인들의 고달픔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제=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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