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생활을 바꾸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듯 문화예술에도 새 가능성을 던져준다. 공학기술은 현대의 악기이자 물감이다. 예술창작에서 공학은 이미 과거와 다른 오감을 향유하는 현대인에게 부응하는 길을 열어준다.
춤추고 대화하는 전자음악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공연장. 세계적인 현대음악연주단인 ‘앙상블 엥떼르콩탕포렝’(Ensemble intercontemporain)의 공연이 열렸다. 무대에는 20년 넘게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씨도 있다. 한 옆에선 남자 무용수가 춤을 추고 무대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선 영상이 나타났다.
무용수와 영상이 함께 한다는 점 외에 또 특이한 사실은 무대 한 켠에 직접 키보드를 잡고 전체 공연을 지휘하듯 조율하는 작곡가다. 사실상 무용수의 움직임과 연주자의 연주는 컴퓨터를 통해 서로 상호작용하며 특정한 소리를 낸다. 전자음악의 대부인 피에르 불레즈 이후 현대음악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전자음악은 이렇듯 종합예술무대로 확장되고 있다.
“이건 즉흥공연입니다. 매일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예측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무용과 연주가 모두 악보에 의한 것이고, 전자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거든요.” 작곡가 한스페터 키부츠는 “악보를 쓴 뒤 각각 연주와 무용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보고 무용수의 움직임이 연주에 반영되도록 프로그래밍했다”며 “전자음악은 무용수와 연주자와 작곡가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단순하게 말해 전자음악은 고전적인 악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음악가들이 컴퓨터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악보를 그리기 전 단계에서 작품을 기획하고, 음을 변형시키고, 다른 연주자의 연주(무용도)에 반응하도록 하는 소프트웨어들이 오늘날의 전자음악을 만든다. “만약 새 지저귐이나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다면 고전 음악이 표현하지 못하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질 수 있지 않겠어요?” 전자음악 연주자인 최지연씨는 음악가들이 컴퓨터를 활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결국 전자음악은 음악가와 컴퓨터 공학자들의 공동작업이다. 음악가에게 기술적 교육과 연구, 제작을 열어주는 프랑스 음향·음악연구소(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IRCAM)는 그래서 세계 전자음악의 핵심이다.
150명의 연구진이 상주하고 공연장, 녹음실, 각종 연구실을 갖춘 이 연구소는 음향에 대한 연구, 작곡가가 활용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책임지며, 음악가들이 컴퓨터로 연주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IRCAM의 베르나르 스티글러 소장은 “예전에는 공학자들이 음악에 이토록 헌신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휴대폰이 상상치도 못한 기능을 다 하는 것처럼 이제 전자음악도 예전의 음악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창의적 표현을 가능케 한다”고 말했다.
속도가 있는 비디오아트
현대음악에서 컴퓨터가 새로운 악기이듯 미술에서는 새로운 물감으로써 표현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 쾰른 미디어예술대 등에서 공부하고 한국과 독일에서 활동중인 부부 작가 ‘뮌’(mioon·김민·최문 부부의 이름 합성)은 최근 코리아나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이미지 시어터’전에서 ‘홀로오디언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반원의 무대모양을 형성한 가로 세로 10㎝의 필름 400장에 400명이 들어앉아 박수를 친다. 필름에 투사된 동영상은 홀로그램이다. 군중의 가벼움, 권력에 의한 군중 통제에 천착하고 있는 작가들은 레이저로 홀연히 박수를 치고 사라지는 홀로그램을 통해 다른 미술장르와는 다른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들의 또 다른 작품인 ‘휴먼 스트림(Human stream)’은 3.5m높이의 거대한 흉상을 거위털로 덮은 위에 군중이 오가는 비디오 영상을 투사하다가 바람이 불어 거위털이 날리면 군중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관객의 마이크 소리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노래방 프로젝트’라는 작품도 있다. 음향조정기(equalizer)에 들어가있는 사람 영상이 노래 소리에 따라 뛰어오르는 모습은 한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군중을 상징한다.
홍익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비디오아트로 길을 바꾼 김민씨는 영상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TV와 인터넷, 게임의 시대에 회화나 조각만으로 대중의 감각을 충족시키기는 모자라기 때문이죠. 저 자신도 감각적으로 ‘속도’를 즐깁니다. 테크놀로지는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활용될 겁니다. 그게 오감을 확장하는 길이니까요.”
두 작가는 프로그래밍도 직접 다 한다. 하지만 최문씨는 “미술적 창의력과 공학적 사고는 사고의 틀 자체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그것이 비디오아트의 잠재력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정작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해서 내놓아도 ‘공학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면 예술적 감흥은 줄어드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보다 섬세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공학도들은 보다 돈이 되는 산업계로 가고 찾기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과학기술계의 참여를 갈구하는 예술가의 고민이다.
파리=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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