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11시 서울대 규장각. 흰 장갑을 낀 김영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장이 사이고 카즈히코(西鄕和彦) 도쿄(東京)대 도서관장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누런 색깔의 고서 한권을 넘겨받았다. 양국 대학 관계자 등 200여명의 참석자들은 숨죽이며 역사적인 장면을 눈에 담았다.
‘中宗大王實錄(중종대왕실록).’ 표지에 적힌 여섯 글자는 이제야 쉴 곳을 찾은 듯 더욱 또렷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7일 서울대에 도착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史庫)본 47책은 이날 인도인수식을 통해 온전히 고국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에 반출된 지 93년 만이다.
1913년 오대산 사고본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에 의해 동경제국대에 옮겨졌다. 23년 관동대지진으로 788책 대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누군가에 의해 대출돼 있던 74책은 화를 면했다. 이 중 27책은 32년 경성제국대(현 서울대)에 돌아왔다. 그러나 나머지 47책은 수십년이 넘도록 동경제국대 도서관 구석 어딘가에서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지난해 말 47책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올해 초 불교계를 중심으로 환수위원회가 구성됐다. 환수위는 고미야마 히로시(小宮山宏) 도쿄대 총장과 수 차례 협상하고 소송까지 준비하면서 일본 측을 압박했다.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TV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희망의 빛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어왔다. 도쿄대 총장이 5월15일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게 “오대산본을 학술교류 차원에서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다. 환수위는 약탈 당한 문화재를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며 ‘기증’에 반대했다. 그러나 형식에 집착해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등록 세계문화유산인 문화재의 반환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오대산본 47책은 이날 먼저 돌아와 기다리던 27책과 나란히 규장각 전시실에 놓였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아무 조건 없이 소유권까지 돌려 받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유 청장은 “정부는 현재 민간에서 추진 중인 김시민 공신교서 반환 노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혀 앞으로 문화재 반환에 가속도가 붙을 것임을 예고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날 오대산본 47책의 국보지정 문제와 관련해 관계 전문가 지정 조사를 실시했으며, 19일 문화재위원회 국보지정분과 회의를 열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오대산본을 26일부터 10월8일까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해 일반에 공개한다. 이에 앞서 22일 오대산에서는 오대산본 환수를 천지신명께 알리는 고유제(告由祭)가 열린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일고 있는 오대산본의 소장처, 관리자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 심의, 관계 기관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신중히 결정하기로 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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