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본 군대, ‘백 중사 이야기’. 병영 드라마도, 한 인물의 삶의 역정에 초점을 맞춘 휴먼 드라마도 아니다. 인위적으로 구성된 집단 체제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제 속의 얼룩을 드러내고, 폭력에 둔감해지며, 자신을 기만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해의 드라마다. 작가 고연옥의 이번 신작은 사회가 한 사람의 약자를 희생양 삼아 어떻게 그를 금 밖으로 내몰고, 정신적 화형대에 세우고 마는가를 그리고 있다 (문삼화 연출, 극단 제이티컴퍼니).
고지식한 자기 비하형의 사내 백 중사. 사랑 받은 기억이라곤 없는, 태생적으로 외로운 이 사내는 부대장의 회유 아래 직업 군인의 길을 걷는다. 그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서 상승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결국 자기처럼 천덕꾸러기로 산 술집 작부 영자를 선택해 혼인하고, 의처증과 부하 학대 등 더욱 가학적으로 자신을 비하해 간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명문대 운동권 출신 이 병장은 부대장에게 백 중사의 왜곡된 권력 행사와 악행을 밀고하지만, 그 자신이 희미하게 감지하는 것은 백 중사라는 일개인에게 군 사회의 모든 모순을 덮씌우려는 집단 폭력의 이면이다. 결국 제대 후 후일담을 통해 전해지는 백 중사의 말로는 부대장의 공금 횡령죄를 대신 짊어지고 불명예 제대하는 쓸쓸한 퇴장이다.
군대라는 하나의 감시 제도 속에서, 삶의 매 순간이 거미줄에 나포된 듯 살아가는 사람들. 무대는 등장 인물들이 처한 심리적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거미줄 문양을 그려 넣은 팔각형 덧마루는 양 갈래로 갈라져 내무반을 표현하기도 하고, 술집, 초소 등으로 순간 순간 변용돼 쓰인다. 이 포박된 세계에서 빠져 나가려 애쓰는 개인은 결국 허공에 몸을 던지는 것만큼 위험한 것임을 말하려는 듯 덧마루 밖을 텅 비워 놓았다.
이러한 무대 디자인은 효율적이고 상징적이지만 극 진행을 다소 설명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제한된 몇 가지 패턴 안에서 공간이 전환되므로 무대 배치에 따라 다음에 올 장면이 미리 읽히고 만다. 사건이 무대를 뒤따르는 주석처럼 느껴지게도 하는 것이다 (무대 디자인 이윤수).
애초 이 무대는 여성 작가, 여성 연출가가 만든 군대 이야기라는 희소성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 연극은 무대화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를 심화시키지 못하고, 외려 축소하거나 유형화시켰다. 아이러니다. 이는 가부장적 시스템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연극을 진두 지휘하는 여성 연출가가 ‘명예 남성’처럼 되어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을 자신도 모르게 사장시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7월 23일까지 대학로 우리극장
극작ㆍ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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