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스만의 주가가 올라가서 기쁘다. 나는 그의 지도력을 찬미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9일 3, 4위전에서 독일에게 패한 포르투갈의 루이스 펠리프 스콜라리 감독)
“독일이 일찍 탈락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클린스만 대신 다른 후임 감독을 찾아야 한다.”(지난 5월 베켄바워 독일월드컵 조직위원장)
불과 2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독일대표팀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월드컵을 치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180도 달라졌다.
3,4위전이 벌어진 9일 슈투트가르트 월드컵경기장. 양팀 선수 소개 때 환호와 박수를 독차지한 사람은 거미손 올리버 칸도, ‘신인왕’ 포돌스키도 아닌 감독 클린스만이었다. 심지어 경기가 한창 진행중일 때도 관중들은 ‘클린스만’을 연호했다.
월드컵 개막 전까지만 해도 선수들과의 불화설, 중도 하차설에 시달렸던 클린스만 감독이 독일축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성적이 좋았으니 모든 게 용서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난 2002년 준우승을 차지했던 독일은 이번 대회 개최국이면서도 오히려 3위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클린스만의 주가가 폭등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부임 초기-욕먹을 조건은 다 갖췄다
90년 월드컵과 96년 유럽선수권 우승의 주역이자 42세로 독일월드컵 최연소 사령탑에 오른 클린스만. 하지만 지도자로 변신한 그의 꽁무니엔 항상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독일언론은 올 초 미국 캘리포니아 자택에 머물면서 전자우편과 화상회의로 근무한 클린스만에 대해 뭇매를 퍼부었다. 팀 내 서열과 평판보다는 실적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혈액 검사를 통해 선수들의 체력을 테스트하려 하자 기성 독일축구계에선 비난이 쏟아졌다.
전통적인 독일축구의 무기는 불굴의 정신력과 경험인데 클린스만은 이를 포기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의 히딩크 감독과 닮은 꼴이었다.
심지어 독일대표팀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미드필더 미하엘 발라크조차 클린스만의 전술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클린스만은 “독일에선 누가 먼저 개혁을 시작하든 욕을 먹게 돼 있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대로 꿋꿋하게 개혁작업을 펼쳐나갔다.
▦녹슨 전차군단을 부활시킨 개혁가
클린스만 취임 이전 독일대표팀은 스리백에 중앙수비수를 최후방에 배치한 ‘리베로 시스템’을 구사해왔다. 이는 독일축구의 강점이자 전통이었지만 현대축구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전방과 최후방의 간격을 좁혀 상대를 압박하는 유기적인 움직임에 독일축구는 뒤처졌던 것.
클린스만은 독일대표팀의 수비라인을 과감하게 포백시스템으로 바꿨다. 포백은 FIFA 테크니컬스터디그룹조차 이번 대회를 지배한 포메이션으로 분석했을 정도다.
독일축구의 타성은 분데스리가의 질적 저하와 맞물려 있었다. 서독시절 경제적 풍요를 앞세워 전성기를 누렸던 분데스리가는 독일 통일이후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중소구단의 몰락으로 “어설프고 느리다”는 딱지가 분데스리가에 따라붙었지만 클린스만은 분데스리가의 젊은 선수들을 적극 테스트하며 발탁했다. 그가 발탁한 포돌스키, 람, 오동코어, 슈바인슈타이거 등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은 독일축구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되자 베켄바워는 물론이고, 골키퍼 레만, 불화설을 빚었던 발라크까지 클린스만의 용병술을 인정하고 그가 독일대표팀 감독으로 남아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바야흐로 클리스만의 가치가 인정 받기 시작한 셈이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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