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속이 아프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공개됐을 때 집권 초기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 했던 말이 상기됐다.
"대통령이 힘이 빠졌다고 신문들이 쓸까 봐" 장ㆍ차관의 회의 출석 여부를 살펴보게 됐다는 농담이었지만 이 말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힘이 빠진 대통령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보도진에 공개된 국무회의의 모두에 일부러 한 말이었던 같은데 "이 정부가 끝날 때까지 이런 유형의 속앓이는 계속될 것"이라고도 했다.
회복되지 않는 낮은 지지도에 언론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장면에서 의기소침한 기운까지 연상되기도 하지만 노 대통령의 고유 화법들 중에는 정반대의 독설들도 적지 않았다.
다변과 직설, 때로는 인터넷 편지 등으로 숱한 파동과 화제를 일으킨 노 대통령이라 이젠 어떤 말을 어느 수준까지 선별해 해석해야 할지를 더욱 모를 지경이 돼 있다. 그러나 푸념인 듯 넋두리인 듯 한 그 날 대통령의 말들을 읽은 국민은 그야말로 '힘 빠진 대통령'을 느끼기가 십상이지 않았을까.
● 말은 대통령직 수행 방식
대통령직 수행 방식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말이다. 많은 동ㆍ서양의 지도자들이 명문의 연설과 말로 자신을 호소하고 대중을 설득해 세상과 국민을 이끌었다. 반면 노 대통령이 여기서 보여 준 것은 불안감과 불신감이었다.
이제 그 며칠 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전세계에 소동이 빚어졌는데 이번엔 노 대통령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이를 대통령의 침묵이라고 비판하는 언론에 대해 대통령이 나서 위기를 말하면 국민이 더 불안해질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정부의 안일한 대처 방식을 의문시하는 언론에 대해 청와대 안보수석은 "대통령이 나서 새벽회의 한다고 달라지는가"라며 '국적도 국익도 없는 보도'라고 엉뚱한 곳을 공격한다. 남한까지 상정된 미사일 도발을 앞에 두고 청와대의 주무 수석비서관이 언론과의 논쟁을 벌이고 있으니,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비상이나 위기 시 지도자가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가려 하는 것은 덕목 이전에 직무 상 의무다. 북한을 향해, 국민을 향해,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게 지금 노 대통령의 명료한 메시지가 나와 있어야 할 때다. 통일부 장관은 사태 발생 직후 비상 매뉴얼에 따라 위기대처를 적절히 했다지만 대통령의 침묵도 그 매뉴얼에 따른 것인지 요령부득의 소리들이다.
알츠하이머 병으로 사망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사실 재직 중 증세를 앓기 시작했다는 탐사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일상적인 서류업무에 차질을 경험했는가 하면, 이란 콘트라 게이트 당시에는 앞뒤가 다른 말 실수들로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보호하고 국정을 유지해 간 것은 비서실장을 비롯한 측근 참모들의 숨은 노력과 공의 결과라는 증언들을 보았다. 레이건의 월등한 리더십과 인간적 면모에 더해 참모들의 탁월한 보좌가 그를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겼다는 얘기다.
● 혼란과 불안 더는 말을 해야
대통령은 참모를 거느리고 참모들은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국정을 함께 한다. 대통령이 유독 불안정해 보이고, 참모들이 제 길을 잃어 가면 국정은 난맥상태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위기는 다른 위기까지 파생하기 마련이다.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속앓이에 빠져 있을 것으로 자신을 전망한다면 사실은 그것도 작은 걱정은 아니다. 그 사이 참모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에다 언론과 여론에 대한 비난과 반박의 글쓰기에나 열중하는 일들이 빈번하니 비정상은 더욱 중첩된다.
노 대통령은 속앓이를 할 시간이 없다. 명확하고 강력한 어조로 미사일 발사가 초래한 불안과 혼란을 덜고 상황을 타개하는 지도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