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여름만 되면 떠오르는 ‘기차의 추억’이 있다. 어릴 적 여름이면 온 가족이 떠났던 기차 여행 때문이다. 매일같이 야근과 출장의 연속이었던 아빠가 1년 만에 휴가를 내면 네 식구가 달려갔던 곳은 바로 경주. 적당한 기차시간과 피서객이 비교적 없는 한갓진 동네라는 이유에서 엄마가 매년 반복하시던 행선지였다.
남동생과 나란히 앉아서 여름마다 듣던 ‘철컹철컹’ 기차 소리는 남매가 모두 30대가 된 지금에도 얘깃거리가 된다. 그렇게 기차는 참으로 은근하고 여전하다. 부산행 고속철도에 올랐던 초겨울, 수덕사에서 서울로 가는 통일호를 탔던 재작년 봄, 목포로 달린 그 여름의 남행열차가 기차 사랑이 유별난 내게 특별한 여정으로 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난 김에 이번 여행은 클래식한 새마을호를 타고 클래식한 안동으로 향해 본다.
1. 구시장의 찜닭
단아한 안동역에 내리면 안동 터미널이 바로 이웃하여 택시나 버스를 잡아타기에 편리하다. 당장 시장하다면 역에서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향할 것. 바로 ‘안동 찜닭’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걷다 보면 튀겨내는 ‘마늘닭’과 ‘찜닭’을 한 간판에 내걸은 닭 집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찜닭에 들어가는 ‘매운고추’를 볶는 냄새가 벌써 코를 찌른다.
그 중 이름을 들어본 유진찜닭(054-854-6019)에 자리를 잡는다. 1만5,000원짜리 찜닭을 하나 시키니 정말 양이 푸짐한 닭요리가 상에 오르는데, 서울에서 먹는 찜닭보다 닭이 크고 실해서인지 씹는 맛이 더 쫄깃하고 덜 달고 덜 짜다. 가족단위로 둘러앉아 닭을 발라 먹는 모습들이 정겹다.
2. 고택의 아침밥
‘고전적’이라는 이번 여행의 테마에 맞추어 고택에 숙소를 잡는다. 고택은 말 그대로 옛집, 오래된 집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통상 종택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종택은 특정 성씨의 일가가 나고 자라온 집으로, 아직도 그 종손과 종부가 거주하며 제사를 모시는 곳. 우리 부부가 찾은 고택의 컴퓨터도 티비도 없는 작은 방은 안동 삼베를 바닥에 먹여 서늘한 기운이 돌고, 하루살이랑 벌레 몇 마리를 잡고 자리를 펴니 절간이 따로 없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자니 물줄기 흐르는 소리에 벌레 울음이 간간히 섞여서 평화롭다.
아침에 안채의 마루로 가보니 상이 하나 놓여 있다. 대게 팔도의 한정식 하는 집들을 보면, 상에 이미 기본 찬들이 죽 차려져 나오질 않나. 그런데 고택의 아침상은 빈상이다. ‘아직 식사 준비가 덜 되었나?’하고 두 내외가 쭈뼛쭈뼛 자리에 앉으니 이어 주인장이 앉으시고, 그 때부터 물이, 찬이, 밥과 국이 차려지기 시작한다.
아, 양반 문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야 그제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예(禮)를 나는 잊었던 것. 김 튀각에 감자볶음, 몇 가지의 나물과 입에 딱 맞는 김치, 생선 구이에 밥, 국이 차려지고 조용한 식사가 시작 된다. 식사를 하면서 종손 어르신의 ‘문중 사랑, 문중 자랑’을 듣는데, 평소 예와 허례의 경계는 모호하며 격식은 불편하다고 몰아붙이는 나와 같이 젊은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할 말씀이다.
3. 청량사의 절밥
안동 터미널 앞에서 67번 시외버스를 타면 35번 국도로 접어들어 도산면으로 갈 수 있는데, 가송리를 지나 종점에 내리면 청량산이 자리한다. 안동시 북부에 위치한 도산면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지역인데, 도산 서원이 기강을 꽉 잡고 있으면서도 낙동강 상류를 따라 레프팅을 할 수 있는 민박집이나 숙박을 할 수 있는 고택도 있어서 마을 내에서 여행의 모든 조건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퇴계, 원효, 의상, 최치원 등이 수도 했던 산으로 주위와 단절된 듯 조용하면서도 물과 나무가 많아 경관이 화려하다. 특히 원효 대사가 세운 청량사는 그 기세가 얼마나 좋은 지 말로 다 못한다. 벌떡 선 바윗길이 이어지는 ‘입석’쪽으로 산을 오르다보면 밟는 맛이 좋은 길과 싱싱한 공기, 툭 터진 경치가 더해져 절 찾아가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청량사에 올라 땀을 식히며 물 한잔 마시고 있자니 지나가는 보살님이 마침 공양 시간이라고, 밥 먹고 가라고 청해 주신다. 절 모퉁이에 차려진 테이블에 앉아 발우를 대신한 대접을 들고 밥이랑 찬이랑 절에서 직접 키운 상추를 먹는데, 그 맛이 꿀맛이다.
해발 800여m를 오른 산행 덕분인지, 절과 산에 둥둥 흐르는 좋은 기운 때문인지 고기반찬 하나 없이 상추에 싸먹는 밥이 두 그릇째 이어진다. 절밥을 처음 먹어 본 남편은 된장국까지 대접으로 훌 마셔가며 연신 “맛있다”하고. 공양 후 법당 쪽으로 걸어 나오니 물 담긴 독이 여럿 있는데, 벌써 연 꽃이 하나 활짝 열리고 있다.
4. 수박 칵테일
안동 꿀수박이 하도 달다 길래 한 통을 덥석 사서, 두 사람이 실컷 먹고 반 통을 남긴다. 오후 더위를 못 이기고 천렵을 나가자는 남편을 따라나서서 수박 반 통을 물에 담그고, 수박이 얼음처럼 차가워 졌을 때 꺼낸 다음 숟가락으로 속을 파내 준비해간 와인이랑 시판 되는 병에 담긴 꿀물, 과일 끄트머리를 넣어 칵테일을 만든다.
만화 ‘식객’을 보면 천렵을 하면서 수박 한 통을 파내어 소주와 꿀을 넣고 만든 수박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딴 것. 팔 다리를 다 걷어붙인 남편이 떡밥 붙인 어항을 설치하고 반도를 들고 물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나는 물에 발만 담그고는 칵테일만 홀짝 거리다 알딸딸해진다.
남편의 어항에는 제법 굵직한 민물고기가 여러 마리 걸려들었으나 탕거리도 없고, 고기들도 불쌍해 보이니 그냥 물에 놓아 주자고 우겨 본다. 기껏 식량을 구해 왔더니 칵테일에 취해서 배시시 웃기나하고, 탕도 안 끓여준다고 투덜대는 남편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놀다 보면 1박 2일은 짧다. 기차랑 버스를 타고, 많이 걷고, 편의시설이 필요없는 고택에서 에어컨 없는 여름밤을 지내보면 시간이 빨리 간다. 이런 여행은 신혼부부나 자식들을 다 시집 장가보낸 중년 부부에게 좋을 것 같다. 신혼부부는 이메일과 휴대폰으로 지지고 볶는 대신, 함께 걷고 함께 땀 흘리면서 더 끈끈한 한 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든 부부라면, 드라마랑 뉴스를 각자 보면서 미뤘던 대화를 물 맑은 소리와 바람을 빌어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식들도 목욕탕 친구들도 다 필요 없이 달랑 둘만 있어도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재발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단, 이틀 이상을 머물거나 맛 집을 두루 다닐 생각이라면, 또는 일행 중에 다리가 허약한 이가 있다면 차로 다니는 것이 좋다. 안동 역전에 렌터카 사무소도 있지만, 이럴 바에는 아예 차로 내려오는 것이 낫겠다.
차로 다니면 안동 시내로 나가 옥동손국수(855-2308)의 들깨국수와 돼지수육을 먹을 수도, 안동댐 근처의 양반밥상(855-9900)에서 안동 최고의 간잽이가 대를 물려 이어온 고등어 밥상의 진수를 맛볼 수 있으니 혀는 더 즐겁겠다.
글ㆍ사진 여행작가 임우석, 요리사 박재은 부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