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당대의 학자들이 두루 사용한 폭 넓은 개념의 학문 혹은 학문하는 태도입니다.”
실학이 조선 후기라는 한정된 시기의 개혁적 학문을 지칭한다는 통념을 반박하는 학술 대회가 개최된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 주최로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열리는 학술 대회 ‘실학의 재조명’이 그것이다. 실학을 비판적으로 살피는 학술 행사로는 처음이다.
이날 학술 대회에서 기조 강연을 하는 한영우(68) 한림대 특임교수 겸 한국학연구소장은 “실학은 고려 말 이후 사회적 필요에 따라 그 내용을 바꿔가며 존재했다”고 말한다. 인륜 문제를 허환(虛幻)으로 본다는 이유로 불교를 허학(虛學)이라 부른 반면, 인륜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성리학을 가리켜 실학이라고 칭했던 때가 고려말이었다고 한 교수는 덧붙였다.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辯)에서 불교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주장한 것이 좋은 보기. 불교가 청산된 16세기에는 강경(講經)이 실학이었다. “성리학이 필기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출세의 도구로 전락함에 따라 경전을 외우고 그 뜻을 말로 풀이하는 강경, 즉 구두 시험(인터뷰)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죠.”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 강경도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비쳐진다. 대신 경전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국가 경영 혹은 민생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 같은 접근법을 실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개혁적 학문으로 규정되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실학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 민족주의 국학자들이 1930년대에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정리하면서 학술 용어로 실학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라본 실학은 민족적 민중적 민주적인 성격을 갖고 있거니와, 복고적 학풍이 아니라 당대 속에서 계승할 가치가 있는 근대적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자면 그에 대한 대비로서 조선은 봉건 사회이고 주자학은 고루한 조선에 봉사하는 학문이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한 교수는 “조선은 중앙 집권 국가이고 관료제가 발달했으며 사유 재산을 인정했기 때문에 서구적 봉건사회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주자학도 우리 필요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강조한다. 주자가 활동하던 11세기 중국 남송과,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맹목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 말에는 주자학 가운데서도 사대부 중심의 권력 구조를, 16세기에는 향촌 자치제를 각각 수용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무력이 아무리 강해도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정통성이 없다는 이른바 정통론을 받아들인다. 비록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으나 정통성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면 한 교수는 실학을 전면 부정하고 해체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한 교수는 “조선 후기에는 확실히 그 이전 보다 더 개혁적인 학문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학”이라며 “그런 생각과 사상은 적극적으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 대회를 마련한 것은, 실학이 너무 단순하고 단일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으므로 학문적으로 좀 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뒷받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실학과 실학자 선양 활동이 갈수록 활발해지는 상황에서는 그런 필요성이 더욱 커진다는 게 한 교수의 생각이다. 한 교수는 그런 차원에서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없앨 이유도, 교과서에서 실학 부분을 뺄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한 교수는 “서구화 시대가 끝나고, 전세계의 모든 나라와 주고받는 세계화 시대가 기다리는 만큼 민족, 민주, 산업화, 과학 등 기존의 실학적 관점 외에 평화와 생명에 대한 관점을 덧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실학은 재야지식인 아닌 주도층 新학풍"
유봉학 한신대 교수 등 관련주제 발표도
학술 대회에서는 한영우 교수 외에 여러 전문가들이 실학과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의 주제를 발표한다.
유봉학 한신대 교수는 '조선 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대두와 실학'을 통해 "실학은 전통 주자학의 내재적 발전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며 정권에서 소외된 재야 지식인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사회의 주도층으로 대두한 경화사족이 제기한 새로운 학풍"이라며 기존 학설과 다른 주장을 편다. 경화사족은 주로 18세기에 조선사회의 주도층으로 대두한 세력으로 그들의 정치적 진출과 함께 그 개혁 구상이 국가 시책으로 수렴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주자학을 했기 때문에 실학이 아닌 것이 아니라 주자학을 어떤 방식으로 연구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선후기 실학의 특징을 주자학과 무관한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리"라고 주장한다.
구만옥 경희대 교수는 "실학의 학문적 지향이 반드시 서양적인 근대일 필요는 없고 실학에서 과도하게 자본주의적 요소를 찾을 이유도 없다"며 "실학이 추구한 새로운 세계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