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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버핏의 경기장'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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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버핏의 경기장'을 넘어서

입력
2006.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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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재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투자의 현인' 워런 버핏의 선언이 최근 미디어의 눈길을 크게 끌었다. 몇몇 언론은 버핏의 이 결정을 삼성이나 현대차 그룹 '오너'의 행태에 견주며 우리 기부 문화의 척박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아닌게아니라 한국 기부 문화를 지탱해온 것이 주로 '김밥 할머니'들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외국 부자들의 기부 문화에 부러운 구석도 있다.

"내 자식들은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이 사회에서 엄청나게 유리한 출발을 했다. 거대한 부의 대물림은 우리가 평평하게 만들어야 할 경기장을 더욱 기울어지게 할 것"(경제잡지 '포춘'과의 인터뷰)이라는 버핏의 멋진 말을 우리 사회 부자들에게선 듣기 어렵다.

● 자선의 손길 뒤에 숨은 '위계'

그러나 버핏에 대한 이 환호는 '나눔의 방식'에 대한 논점 하나를 흐려버릴 수 있다. 그것은 가난 퇴치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그들의 자선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부에 바탕을 둔 자선사업을 선양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덜 혜택받은 사람들을 일종의 '구걸자'로 만드는 것이다.

자선의 아름다운 손길 뒤에는 음험한 위계 철학이 웅크리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너그러움과 친절에 기대어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부(富)는 '환원'의 대상이 아니라 '분배'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분배의 엔진은 개인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공동체의 법이다. 가장 너그러운 부자들도 듣기 싫어하는 '세법' 말이다.

기술적 문제들을 잘 풀어나가며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을 만큼 걷어 이를 온전히 서민 복지에 쓴다면, 부자들이 굳이 기부나 자선사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마따나 '국가의 왼손'(복지 관련 부처들)은 과거의 사회 투쟁이 국가 한복판에 남겨놓은 흔적이므로, 서민들 역시 부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위에 인용한 버핏의 인터뷰 발언을 나는 '멋진 말'이라 추켜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정도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 부자들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버핏은 자기 자식들이 살아갈 사회 곧 미국 사회를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라 규정했다.

능력주의 사회는, 말할 나위 없이, 갖가지 불합리한 연줄로 사람의 값어치가 매겨지는 사회보다 좋은 사회다. 능력은 마땅히 보상받아야 한다. 만약에 능력이 아무런 덤의 보상을 받지 않는다면 누구도 능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을 테고, 그런 사회가 퇴락할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런 한편, 그 보상의 차이가 능력 차이보다 터무니없이 커서는 안 된다는 점도 엄연하다. 그것이 정의감각에 부합한다. 더욱이, 버핏의 고백대로, 부자의 자식들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엄청나게 유리한 출발을 하게 마련'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능력주의가 견고한 사회일수록, 보상 차이는 능력 차이보다 훨씬 더 커지기 쉽다.

이런 '쏠림'은 이른바 '슈퍼스타의 경제학'이 고스란히 작동하는 연예계나 프로스포츠계에서 두드러지지만, 이미지가 구매심리를 주무르는 현대의 시장 일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등과 2등의 능력 차는 아주 작을 수 있지만, 그들이 받는 보상의 차이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 차이를 줄여 사회 갈등을 눅이는 것이 세법이다.

● 세법이 분배의 엔진 돼야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스는 이른바 '사회적 일차 상품'(자유, 기회, 소득, 부, 자존감 따위)을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정의의 원칙들'이라는 분배규칙을 고안한 바 있다. 그 원칙 하나는 "모든 사회적 일차 상품들은 이것들의 일부 또는 전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최소 수혜자의 이득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것이다.

버핏이 꿈꾼 '평평한 경기장'은 '부자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더욱 기울어진 경기장'보다는 정의로운 경기장이다. 그러나 더 정의로운 경기장은 '서민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약간 기울어진 경기장'일 것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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