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숨죽여 내리는 밤들이 이어진다. 밀폐된 공간을 거처로 삼게 된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빗물은 고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비가 오고 있음이란 더 이상 이것이 무엇과 부딪는 소리이기보단 유리창에 점점이 얼룩지며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으로 더욱 빈번히 경험케 되기 때문이다.
● 일상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사실 유리창만큼 문학적 정서와, 도시의 첨단 건축기술이 주는 냉건한 이미지 사이를 어색하게 오가는 대상도 흔치 않을 것이다. 때로는 문학적 풍경을 매개하는 관조의 틀로, 때로는 강인하게 기후를 버티는 벽이면서 동시에 가벼움, 확장의 인상, 투명함 등의 미덕을 갖춘 현대 기술의 아이콘으로 말이다.
묘하게도 유리창은 분명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자신을 취급해주길 바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투과성만이 스스로를 거의 차지하는 실체인 탓일 거다.
일상에서 우리말의 '투명하다'란 표현은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들과 그 뜻이 닿기 마련이다. 솔직하다, 숨김없다, 알기 쉽다, 자신 있다, 밝다, 트여 있다,
모던하다 등. 물론 가끔은 그것이 누군가의 내면이든 또 어떤 이미지든 쉽게 들여다보인다는 이유로 단조로움, 얕음, 가벼움의 누명(?)을 쓰기도 하지만. 반면 '불투명하다'란 표현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사건에만 주로 불려다니는 것 같다. 불확실, 불분명, 비밀스러움, 난해함, 모호함, 폐쇄, 음모, 일방적 시선이나 감시, 감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선지 어느새 현대 유리의 맑고 투명함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식은 일상에서 이의 불투명함에 무심코 맞닥뜨릴 때마다 여러모로 쉽게 침해되곤 한다.
타인의 짙은 선글래스가 발하는 시선, 어둡게 틴트된 유리창, 반사유리 칸막이, 감시카메라의 유리 덮개 등. 실제로 사려를 가진 건축가들이라면 서로 약속한 일도 없는데 하나같이 자기 작업에서 반사유리나 지나치게 난한 색유리의 적용을 애써 기피하려는 불문율을 갖고 있어 흥미롭다.
지금의 도시가 일구어낸 유리의 숲은 분명 공학적 연구와 기술의 쾌거이긴 하다. 이것의 핵심이랄 수 있는 투명성이 인간에게 새로운 시야와 야경을 제공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투명성이란 것이 현실의 진부하고 익숙한 이미지들을 위주로 들여다보게, 또는 내다보게 하는 근대적 경험을 제공하는 한 이제 더 이상 이의 값을 쳐주는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의 유리벽은 좀 더 낯선 풍경, 극단적인 경우 언뜻 비현실적인 공간이나 이미지들을 찾아서 탐사를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심해어들이 비늘을 번쩍이며 유영하는 초대형 수족관들 사이를 걷는 일이 현실이면서도 어쩌면 비현실이기도 한 경험이듯.
● 낯선 이미지들을 찾아서
이처럼 유리란 물질은 우리가 지금껏 현실에서 임의로, 즉각, 경험할 수 있으리라 설마 기대치 않았던 세계의 전모를 걷어내고 있는 기특한 기대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거시적인 규모의 낯선 풍경이나 공간을 담든, 기계미학과 같은 비교적 미시적인 이미지들의 투명한 대체 피복이 되어버리든.
김헌ㆍ어싸일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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