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텔레비전 토론이 힘을 얻은 것은 제5공화국 군부파쇼 체제를 무너뜨린 1987년 6월항쟁 뒤다. 제5공화국은 컬러텔레비전 시대를 열어 시청자들의 색채감각을 키웠지만, ‘땡전 뉴스’라는 말로 상징되는 그 시절 텔레비전의 정치 시사 담론은 편파적 정권 홍보로 일관하며 시민들의 정치감각을 뭉그러뜨리는 데 골몰했다.
그 시절에도 토론 프로그램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다. 제5공화국 초기에는 KBS의 ‘90분 토론’ ‘8시에 만납시다’와 MBC의 ‘이야기 좀 합시다’ 따위가 전파를 탔고, 80년대 중반에는 KBS의 ‘금요 토론’ ‘시청자 토론’과 MBC의 ‘일요 토론’ ‘일요 광장’ 따위가 편성됐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출연자들 사이의 토론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기보다 비슷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끼리의 좌담을 통해 시청자를 ‘계도’한다는 취지가 컸다.
기실 이런 형식의 토론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이 대중의 일상생활에 파고들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있었다. KBS의 ‘TV 응접실’(1962)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1965), TBC(동양방송. 삼성계열의 민영 방송사로 1980년 언론통폐합 때 KBS에 흡수됐다)의 ‘동서남북’(1967)과 ‘TBC 공개토론회’(1969), MBC의 ‘젊은 대화’(1969) 따위가 대표적이다. 특히 TBC의 ‘동서남북’은 최초의 본격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이 프로그램들 역시 80년대 토론 프로그램들처럼 당대 정치체제의 폭력성에 주눅들 수밖에 없었고, 정권의 눈치를 세심히 살피는 방송사 쪽의 잦은 개편으로 그 수명도 길지 못했다. 1987년 시민항쟁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물살을 흘려보내기 시작한 뒤에야, 텔레비전은 토론다운 토론의 마당이 되기 시작했다.
그 선편을 쥔 것은 KBS의 ‘심야토론’이다. 1987년 10월에 돛을 단 ‘심야토론’은 그 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의 본보기 노릇을 하며 여론의 바다를 주항해 오늘날 최장수 토론 프로그램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사회자가 노골적으로 한 쪽 의견을 편들어 시청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서로 다른 정치적 사회적 견해 사이의 대화를 그럴 듯하게 이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심야토론’의 의의는 크다.
‘심야토론’이 풀무질한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 활성화 바람은 다른 방송사들로도 펴져 나가, 오늘날엔 지상파 방송 모두가 두세 개씩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MBC의 ‘백분토론’은 1999년에 시작됐다.
‘백분토론’은 손석희라는 이름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작고한 경제학자 정운영씨와 지금 복지행정 수장으로 있는 유시민씨가 손석희씨 이전에 이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긴 했지만, ‘백분토론’에 다른 방송사들의 비슷한 프로그램과 확연히 다른 경쟁력을 공급한 것은 손석희씨다. 전문 아나운서 출신답게 말씨도 스타일도 깔끔한 그는 공정한 진행자로서 토론 분위기의 이완을 조절하며 그 흐름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토론 사회자가 되었다.
‘백분토론’과 손석희씨의 영향은 상호적이었다. ‘백분토론’을 가장 영향력 있는 토론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은 손석희씨지만, 손석희씨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만든 것도 (그가 MBC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아침 프로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더불어) ‘백분토론’이라 할 수 있다.
올해 3월 성신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손석희씨는 지금도 ‘백분토론’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에 의해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손석희씨의 예에서 보듯,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은 스타를 낳는 분만실이 될 수 있다.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단골 손님으로 거기 초대되는 이들은 시청자들에게 연예인 못지않게 친숙해질 기회를 얻게 돼 ‘명망성’이라는 무형 자산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 덕분에 태어난 또 다른 스타는 유시민씨다. 그는 손석희씨 이전의 ‘백분토론’ 진행자로도 꽤 훌륭했지만, 토론자로서 훨씬 더 유능했다.
유시민씨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논리와 박식과 능변으로 상대 토론자들을 제압하며 ‘똑똑한 사람’의 이미지를 얻었고, 스튜디오에서의 뜨거운 논쟁을 효과적인 정치 마당으로 활용함으로써 수많은 팬과 안티팬을 얻었다. 글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
(말싸움에서 유시민씨를 눌렀다고 판정받은 이로 국회의원 전여옥씨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타래를 팽개친 채 막가는 ‘기싸움’ 얘기이므로 ‘토론’과는 무관하다.) 본디 글 잘 쓰는 논객이었던 유시민씨는 사람을 압도하는 말솜씨를 보여줌으로써, 글 잘 쓰는 사람은 어눌하다는 속설을 불식시켰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젠 토론에 능하지 않으면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유시민씨가 짧은 기간에 정치적 자산을 크게 불릴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토론에 능하다는 사실과 꽤 관련이 있을 테다. 텔레비전 토론이 정치에 가장 깊이 간여하는 것은 대통령 선거 때다.
대통령 후보 사이의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97년 제15대 대선 때부터다. 그 전에도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여론의 요구는 있었으나, 우세한 후보가 이를 꺼려 당사자들끼리의 토론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텔레비전 토론은 정치에 깊숙이 끼여들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부터 본선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후보는 논리와 달변에 더해 신뢰감 주는 말투로 자신의 지적 능력과 도덕성을 과시하고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텔레비전 토론의 융성은 정치인들을 비디오형 인간으로 만들었다. 토론에서는 논리의 힘도 중요하지만, 난처한 질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재치와 순발력, 시청자들을 매혹할 수 있는 감성적 소구 능력, 게다가 외모와 표정과 제스처 따위가 그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뛰어난 정치인의 능력은 뛰어난 연예인의 능력과 많은 부분 겹치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가 문화상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정책 결정과 수행이라는 본업을 잊은 채 늘 미디어에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 버린 셈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는 전통적 편견은 이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토론하는 능력은 한 사람의 총체적 정신 능력의 큰 부분을 보여주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를 포함한 대중 앞에서의 토론이 근본적으로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론자들은 토론 상대자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토론 언어는 내면의 언어가 아니라 외면의 언어다. 아니 내면을 가장한 외면의 언어다.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 장관은 그 점에서 가장 뛰어난 토론자였다. 그들은 치밀한 논리에다 간절한 진정성의 분위기를 더해 열광적 지지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신들의 언어가 일종의 연극대사였다는 것을 오래도록 숨기지는 못했다. 정치는 그 시작부터 연극의 성격을 띠었지만, 오늘날처럼 그 연극적 성격이 짙어지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입말과 글말 사이
영문학자 도정일씨와 생물학자 최재천씨의 대담을 수록한 ‘대담’(2005, 휴머니스트)은 오늘 우리가 살핀 텔레비전 토론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우선 이 책은, 그 부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가 드러내듯, 좁은 의미의 정치 담론이 아니라 두 문화 사이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름이 알려진 ‘교양인’ 사이의 토론답게, 견해 차이의 ‘격렬함’도 비교적 우아한 언어의 면사포로 가려져 있다.
지면 대담의 언어는 텔레비전 대담의 언어와 다를 수밖에 없다. 녹취된 언어가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윤문과 편집을 거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면 대담은 텔레비전 토론의 입말과 서신 토론의 글말 사이 어디엔가쯤에 자리잡게 된다. 도정일씨와 최재천씨의 ‘대담’도 그렇다. 그들의 언어는 텔레비전 토론 언어보다는 화장을 한 언어지만, 서신 토론의 언어에 비하면 맨살에 가까운 언어다.
그런데도 ‘대담’에서 더러 텔레비전 토론 언어의 ‘불완전성’이 드러나는 게 흥미롭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동문서답’이랄까 ‘딴소리’랄까 하는 특징이다. 상대방의 물음이나 이의 제기에 곧이곧대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특히 연장자인 도정일씨 쪽이 그렇다.
그럴 때 토론 상대자나 토론 진행자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만도 하건만, 대개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 버린다. 대담자에 대한 배려이기는 하겠으나, 독자에 대한 배려는 아니다. 또 대담공간이 공적 자리는 아니었을지라도 출판을 염두에 둔 대담이므로, 이들의 언어는 상대방을 향하는 동시에 불특정 다수 독자를 향하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 언어가 상대방 못지않게 시청자를 향하듯 말이다. 이 책의 대담자들은 겸손과 허세를 뒤섞으며, 드물게는 자가당착을 무릅쓰며, 일종의 연극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대담’은 젊은이들이 읽어둘 만한, 좋은 책이다. 대담자들이 대화의 결론으로 내놓은 ‘공생인’(共生人)이나 ‘두터운 세계’ 같은 말은 모든 지혜의 언어가 그렇듯 진부하지만, 거기 이르기 위해 그들이 네 해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며 들여다본 문화와 유전자의 세계는 동물이면서도 끝내는 동물이 아닌 인간의 자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두 대담微?상대 영역에 대해 만만찮은 교양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캐스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양이나 전문성은 동아시아 전통 속에 있다기보다 유럽 전통 속에 있다. 아쉬우면서도 이해할 만하다. 그 사실 자체가 지금 단계 한국 문화의 좌표를 드러내는 것이니.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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