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은 참 행복했다. 4년 전의 황홀감에는 못 미쳤지만 6월의 절반은 신바람 나는 축제기간이었다. 한반도의 온 국민이, 지구촌 구석구석의 한민족이 광장으로, 스타디움으로, 거리로 쏟아져 붉은 물결을 이루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밤을 사르며 응원하느라 눈은 충혈되고 목은 잠겼지만 태극전사들에게 쏠린 국민적 염원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16강의 좌절로 도도했던 붉은 물결과 함성은 한 바탕의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지만 국민의 가슴 속엔 행복하고도 소중한 축제로 남아 있다.
● 대리만족 찾아 붉은 물결 동참
무엇이 이토록 국민을 거리로 불러내 열광케 했는가. 무엇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붉은 셔츠를 찾아 입고 낯선 사람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춤추며 노래하게 했는가. 많은 분석들이 나왔다.
축구가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한 원시본능을 일깨우는 스포츠라는 데서 해답을 찾기도 한다. 들판을 달리는 수렵시대의 원시인을 떠올리는 경기모습에서 잃어버린 원시본능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원시본능을 좇아 꽉 짜인 일상의 틀에서 잠시 탈출해 엑스터시와 카타르시스를 맛보려는 집단행동으로 보는 시각이다.
일부에선 붉은 물결에서 극단적 광기를 읽으며 민족주의의 빗나간 표현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일사불란한 응원과 선을 넘지 않는 질서의식이 찬탄의 대상이 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를 뒤덮었던 붉은 물결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16강 좌절과 함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면 기우인 것 같다.
이런 분석들이 일리 있다고 여겨지면서도 열광의 까닭을 다른 데서 찾고 싶다. 축구가 아무리 열광적인 요소로 응축된 경기라 해도 평소 국내 축구리그에는 무관심하다 국가 대항전이나 월드컵에 열광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들이 축구대표팀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대표팀 감독에게서 마음 속에 갈망하는 지도자상을 찾는다. 축구대표팀을 맡았던 7명의 외국인 감독 중에는 실패한 감독도 있고 성공한 감독도 있다. 성공한 감독이 조련한 대표팀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선수들의 성과 못지않게 힘있는 감독의 카리스마, 신뢰가 따르는 전략, 적절한 상황판단과 용단 등을 성공한 감독에게서 읽어내는 즐거움을 누렸다.
처음부터 히딩크나 아드보카트가 선수들이나 국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와 신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성급한 국민들의 비판을 견디며 소신을 갖고 팀을 담금질했고 결국 선수와 국민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대표팀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우리가 갖고 싶은 지도자의 덕목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외국인 감독에게 그렇게 호의적이고 열광적일 수 없다.
선수들의 열정 또한 국민들이 갈구하는 프로 정신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한일월드컵 때나 독일월드컵 때나 태극전사들의 불굴의 투혼과 남김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열정, 그리고 끈끈한 조직력과 내부 결속력은 큰 힘을 발휘했다.
냉정하게 보면 2002년 월드컵이나 독일월드컵에서 우리 팀의 실력이 결코 우수했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 팀에 무엇이 부족한지 국민들은 알고 있다. 그럼 세계가 놀란 성과를 이룬 원천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모자란 것을 보완해준 것은 다름 아닌 감독의 지도력, 선수들의 투혼, 그리고 국민들의 열렬한 성원이었다.
● 정부ㆍ정치권 부끄러움 알아야
이밖에도 엄격한 경기규칙과 이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심판들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엄정히 지켜지는 ‘룰은 룰’이라는 대원칙, 결과에 따라 스스로 진퇴를 결정하는 감독들의 처신 등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국민들에겐 신선한 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우리 국민들이 월드컵에 열광한 까닭은 결국 복장 터질 일만 골라 하는 정부와 정치권에 있었던 것이다. 오죽 재미 없고 마음 줄 곳이 없었으면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는 붉은 물결에 휩쓸려 발을 구르며 열광했겠는가. 국가경영을 책임진 사람들은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열광을 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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