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B(구 경제기획원의 영문약자)는 승승장구다. 반면 MOF(구 재무부의 영문약자)의 추락엔 날개조차 없는 것 같다. 한 때는 한솥밥을 먹으며 ‘범 모피아(MOFIAㆍ재정경제부의 영문 머릿글자인 MOFE와 마피아의 합성조어)’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현재 두 부처 출신들의 운명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3일 단행된 개각에서 경제부총리로 내정된 권오규 청와대 정책실장, 정책실장 내정자인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변 장관의 후임을 맡게 될 장병완 기획예산처 차관 등 3명 모두 EPB출신이다. EPB와 MOF의 통합체인 구 재정경제원이 외환위기 직후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당시엔 기획예산위원회)로 분리되면서 권 실장은 재경부, 변 장관과 장 차관은 기획예산처행을 택했지만 그 뿌리는 같다.
이들 뿐 만이 아니다. EPB라인은 참여정부 주요 경제포스트에 대거 포진해있다. 전윤철 감사원장이 EPB 출신 현직 가운데 ‘맏형’이다. 장관급으론 김성진 해양수산부장관과 김영주 국무조정실장이 있고, 노준형 정보통신부도 원래 고향은 EPB다. 차관급에도 박병원 재경부1차관, 변재진 보건복지부차관, 임상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유영환 정통부차관 등이 있다. 물러나는 한덕수 부총리도 공무원 출발은 EPB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박봉흠 전 정책실장도 정통 EPB맨이다.
권 실장-윤대희 경제수석-김대기 경제정책비서관으로 이어지는 청와대 경제라인 역시 EPB 일색이다.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도 EPB 출신이어서, 당(강봉균)-정(권오규)-청(변양균)의 경제사령탑을 모두 EPB가 장악하게 됐다.
물론 EPB의 약진이 참여정부의 ‘편애’결과는 아니다. ‘국민의 정부’ 5년은 강봉균ㆍ진념ㆍ전윤철 전 재경부장관과 이기호 전 경제수석 등 EPB 호남인맥이 사실상 주무른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까지 ‘EPB 10년 세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반대로 최고의 엘리트 관료를 자부하던 MOF의 침몰은 참혹할 정도다. ‘대부’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것을 비롯, 현대차 비자금사건의 불똥으로 변양호 보고펀드대표, 연원영 전 자산관리공사사장, 김유성 전 대한생명감사 등 MOF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MOF출신 중에서도 특히 화(禍)를 입는 쪽은 ‘모피아’의 본류격인 금융 라인이다. 금융과 함께 MOF의 양대 축을 이뤘던 세제 파트는 그래도 건재한 편. 경제와 교육 수장을 모두 거친 김진표 부총리, 국세청장을 거친 이용섭 행정자치부장관 등이 그렇다.
이 같은 대조적 운명에 대해 한 재경부 출신인사는 “EPB와 MOF는 걷는 길이 달랐을 뿐 도덕성이나 능력문제로 보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사실 예전부터 EPB는 강력한 예산권을 무기로 장ㆍ차관이나 공기업 사장 등 정부ㆍ공공부문으로 진출했던 반면, MOF는 이른바 관치적 시장규제를 지릿대 삼아 금융권에서 거대 인맥(모피아)을 형성해왔고 재경원 통합과 재경부-기획예산처 분리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같은 전통은 유지되어 왔다. MOF의 몰락은 이처럼 정부와 민간 부문이 인맥화된 데서 빚어진 구조적 결과였던 것이다.
반대로 EPB출신들은 민간으로 진출하지 않은 채 정부 내 거대 인재풀을 형성해왔고, 바로 여기서 정부내 핵심 인사들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배출되고 있다. 지금의 인적 세력판도를 볼 때 EPB의 전성시대는 참여정부 임기 끝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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