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들이 미국이나 일본 기업에 비해 성장 잠재력이 훨씬 높은데도 이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과소성장(過小成長)' 증후군의 초기 상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매년 늘어나지만 투자와 고용은 늘어나지 않아,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감소하고 있다.
3일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경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지속가능 성장률(외부 자금 차입 없이 자체 역량으로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수준)보다 13.39%포인트 높은 수준의 급성장을 거듭했으나, 2001년 이후에는 실제 성장률이 지속가능 성장률을 1.47%포인트 밑돌고 있다. 90년대에는 너무 빨리 성장해서 문제였으나, 2001년 이후에는 조로증(早老症)에 빠져 성장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미국 기업의 경우 90년대에는 실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에 크게 못 미쳤으나, 2001년 이후에는 오히려 한국 기업보다 공격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기업 역시 90년대와 2000년 이후의 성장률 갭이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성장률이 오랜 기간 잠재성장률을 밑돌면서 기업 금고에서 잠자는 현금이 급증하고 있다. 대우증권에 따르면 증시에 상장된 주요 146개 제조업체의 2000년말 보유현금은 19조9,120억원에 불과했으나 2005년말에는 47조7,193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말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6조8,686억원이며, 현대자동차와 포스코의 현금성 자산도 6조63억원과 3조2,577억원에 달한다.
LG경제연구원 배지헌 책임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재무구조 개선노력으로 한국 기업의 잠재 성장률이 크게 개선됐는데도, 실제 성장률은 잠재 성장률에 못 미치는 '과소성장'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국내 대기업이 투자나 인력 채용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매년 창출되는 '양질의 일자리'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연구원은 '괜찮은 일자리 감소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지난해 창출된 '괜찮은 일자리' 수는 총 14만개로 2004년의 30만개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밝혔다. '괜찮은 일자리'는 전체 산업의 평균 임금 수준을 웃도는 산업 부문에서 창출된 일자리를 뜻한다.
손 연구원은 지표상의 실업률이 안정됐는데도 체감 고용사정이 악화하는 것은 취업 준비생들이 '괜찮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자발적으로 노동시장 진입을 미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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