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축구 강국들은 예상대로 조별리그를 순조롭게 통과했고,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제3대륙은 기대보다 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개최국의 장마를 피하기 위해 개막 일정을 앞당기느라 스타급 선수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강호들이 줄줄이 탈락한 2002년과는 다른 풍경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유럽리그는 평소보다 일찍 마감됐고, 스타급 선수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월드컵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럽의 득세, 남미의 부진, 아시아ㆍ아프리카의 몰락
누가 그랬던가. “유럽선수권대회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더하면 월드컵”이라고. 이번 대회가 그랬다. 아프리카의 가나와 북중미의 멕시코를 제외하면 16강은 온통 유럽과 남미였다. 특히 아시아팀들에게 7시간의 시차와 미끄러운 잔디는 만만치 않은 적이었고, 심판들 역시 개최국이 아닌 그들에게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았다. 지역예선에서 이미 수많은 이변을 경험한 아프리카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월드컵 경험이 전무한 나라가 4팀이다 보니 좋은 기량을 갖추고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더구나 승승장구 하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마저 8강에서 탈락해 이번 대회는 온전한 유럽인들의 잔치로 남았다. 4강이 유럽팀들로만 짜여진 것은 82년 스페인대회 이후 처음이다.
넣기 전에 막아라
골 가뭄이다. FIFA가 공격축구를 유도하려는 심산으로 오프사이드 규정을 완화했지만 애당초 공격할 뜻이 별로 없던 각 팀들의 전술까지 바꿔놓지는 못했다. 승리의 욕구보다 지지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앞선 소극적인 축구는 월드컵 재미를 반감시켰다. 득점유도를 위해 연장전 골든골제도를 폐지한 FIFA의 노력도 공염불에 그쳤다. 필드골로 승부를 가리고 싶어하지 않는 팀들에게 연장전 30분은 승부차기로 가는 무의미한 시간일 뿐이었다. 이쯤 되면 몇 분간 슈팅이 나오지 않을 경우 주장에게 옐로카드를 주는 규정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점에서 가나의 16강 탈락은 아쉽다. ‘고매하신’ 축구 강국들의 안전주의를 비웃듯 시종일관 ‘전진 앞으로!’를 외치던 가나는 비록 결정력 미숙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많은 축구팬들의 갈채를 받았다. 가나같은 팀이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이번 월드컵은 정말 즐거운 대회가 됐을지 모른다.
노련미가 패기를 누르다
새로운 세대에게 선배들은 여전히 높은 벽이다. 큰 대회일수록 노련미가 패기를 압도하게 마련. 프랑스와 브라질의 8강전은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던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클로드 마켈렐레, 릴리앙 튀랑은 전성기 못지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브라질을 조기에 귀국시켰다. 특히 지단은 현재 세계 최고의 스타로 불리는 호나우지뉴를 상대로 아직 자신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조별리그를 가뿐하게 통과한 네덜란드와 스페인 역시 노련미 앞에 무릎을 꿇은 패기의 대명사들. 조별리그 부진을 이유로 노련한 골게터 뤼트 판 니스텔로이를 제외한 네덜란드는 젊은 공격수 3총사를 전방에 내세워 8강에 도전했지만 루이스 피구, 파울레타 등의 백전노장을 앞세운 포르투갈에 막혀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반가운 발견도 있었다. 그 중 앞머리에 놓아야 할 선수는 프랑스의 프랑크 리베리다. 지난 시즌 프랑스리그를 들었다 놓았던 이 젊은 미드필더는 노장 가득한 프랑스 대표팀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저돌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문전을 헤집던 가나의 아사모아 기안도 빼놓을 수 없다. 수 차례 골 찬스를 놓치긴 했지만, 상대 골문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공격적 본능은 수비에 매진하는 현대 축구에 경종을 울리는 매력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뮌헨에서(MBC 축구해설위원, 엠파스 토탈사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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