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하지마. 난 당신을 너무 잘 알아. 난 당신이랑 하고 싶어. 제발 날 가져. 날 가져….” 남자를 붙들고 여인은 온 몸으로 말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 상황은 절망적일 뿐이다
늦가을, 비 내린 직후의 공동묘지 한 켠은 사랑의 장소로는 너무 낯설다. 그러나 사랑은 때론 그렇게 치명적이다. 위선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갈구하는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유럽의 지성파 연극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의 1999년 작 ‘가을날의 꿈’이 공연된다. 12월로 예정된 일본 공연을 제치고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이뤄지는 무대다.
연정을 감춰 온 두 남녀는 오랜 세월 뒤, 뭔가에 홀린 듯 묘지라는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남자는 결혼해 아버지가 돼 있지만 지금은 성 불구다.
두 사람의 농밀한 대사가 이끌어 가는 이 연극은 이루지 못 한 사랑, 잔인한 시간에의 복수다. 남자에게 여자는 옷을 벗으며 섹스를 요구한다. 섹스에 대한, 여인의 농밀한 요구는 잃어버린 사랑에의 갈망처럼 공연 내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의 대화는 언뜻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있는 그대로”를 강조하는 포세식의 화법이다. 웅변이나 장광설이 아니라, 침묵과 주저, 망설임과 반복 따위가 오히려 현실적인 대화 방식이라고 그는 믿는다. 미니멀리즘 음악처럼 단속적으로 끊기는 대사는 그리움, 후회 등 두 사람 사이에 흩뿌려진 사랑의 편린들을 효과적으로 건져 올린다.
노골적인 성적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의 몫이다. 여인 역의 예수정(50)씨는 “관능성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싶다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질적 소유욕과 갈망에 대한 표현이라는 얘기다.
번역본 형태로 알려지면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진작에 성가가 높았던 작품이다. 단단한 추종세력을 갖고 있는 ‘희곡 낭독 공연’에서 2004년 본격 소개된 이래, 무대화 요청이 잇따랐다. 이번 공연은 5월 초에 노르웨이까지 가서 작가를 만난 연출가 송선호씨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번역자 정민영씨는 “여백이 중요한 무대”라고, 송씨는 “스토리나 갈등, 심리 묘사 같은 연극적 관행에서 비껴 나야 제대로 보이는 무대”라고 말했다.
볼거리, 들을거리가 넘쳐 나는 요즘 연극의 대세를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듯한 무대다. 별다른 장식 없이, 꿈이나 환상 같은 분위기가 넘치는 푸른 색 무대는 객석의 시선을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잡아 끈다. 독문학을 전공한 배우 예씨는 “지난 5월 번역본과 독어본을 비교해 가며, 작가의 호흡을 따라잡으려 애썼다”며 “기억, 꿈, 예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녀의 삶을 주목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윤석, 박상운, 이정미 등 출연. 7~30일 아룽구지. 월수목 오후 7시30분, 금토 4시30분 7시30분, 일 3시. (02)744-0300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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