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손, 철벽 수문장, 최후의 보루. 이런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돼 있지만 골키퍼는 그라운드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다. 골키퍼의 뒤에는 골대와 네트뿐. 10개의 슈팅을 막아내도 하나를 놓치면 끝이다. ‘잘해야 본전’인 만큼이나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각국 골키퍼들의 애환도 다양하다.
▦골문 대신 벤치- 올리버 칸(독일), 그레고리 쿠페(프랑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그를 기억하는가. 야신상과 최우수선수상에 해당하는 골든볼을 동시에 거머쥔 독일의 올리버 칸(37). 세계 축구사에서도 손꼽을 만큼 놀라운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 그의 위치는 ‘후보’다. 독일대표팀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믿음을 얻지 못해 단 1분도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젊은 후배에게 밀렸다면 나이 탓이라도 하겠지만 주전 골키퍼 옌스 레만은 동갑내기다. 레만은 개막전에서 2골을 내준 이후 3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프랑스의 그레고리 쿠페는 ‘토사구팽’된 케이스다. 지역예선까지 주전 골키퍼로 골문을 지켰지만 막상 본선에 들어가자 바르테즈에게 밀렸다. 팀을 무단 이탈하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다 막았는데 집으로-추베르뷜러(스위스)
야구로 따지면 9이닝을 노히트 노런으로 막고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투수와 비슷하다. 스위스의 추베르뷜러는 조별리그 3경기와 우크라이나와의 16강전 4경기에서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무려 18차례나 상대공격수들의 유효슈팅을 신들린 듯 막아냈지만 결과는 8강 탈락으로 짐을 쌌다. 특히 우크라이나와의 16강전 승부차기에선 상대 1번 키커 셰브첸코의 킥까지 막아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지만 동료들의 잇따른 실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많이 막고, 많이 먹고-킹스턴(가나), 가와구치(일본), 아가사(토고)
가장 바쁘고 정신 없었던 골키퍼들이다. 가나의 리처드 킹스턴은 16강전까지 4경기에서 이번 대회 참가한 골키퍼 가운데 가장 많은 22개의 선방을 기록했다. 360분을 뛴 그로서는 16분마다 한번씩 멋진 선방을 펼친 셈. 그러나 빛(선방)만큼이나 그림자(실점)도 짙었다. 모두 6골을 허용해 경기당 실점이 1.5점에 달했다.
일본의 가와구치도 21개의 눈부신 선방을 기록했지만 7골을 먹었다. 일본이 조별리그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이유다. 한국의 원정 첫 승의 제물이 된 토고의 코시 아가사도 한국, 프랑스, 스위스의 파상공세 속에 17개의 선방을 기록했지만 힘이 부쳤다. 그나마 6골밖에 허용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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