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을 19세기 말 유럽의 문화수도로 만든 황금빛 관능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키스’ ‘유디트’ ‘다나에’ 등을 통해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여준 클림트의 예술세계가 초현실주의적 영상으로 유명한 라울 루이즈 감독과 성격파 배우 존 말코비치에 의해 스크린 위에 현현한다.
그러나 천재적 예술가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를 예상했다면 주인공의 머리 속을 휘젓고 다니는 이 영화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전체보다는 세부, 내용보다는 장식을 중요시했던 클림트의 그림처럼, 영화 ‘클림트’도 탄생에서 성공, 쇠락에 이르는 단선적 연대기 대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아르누보’의 표현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매독으로 사경을 헤매는 클림트(존 말코비치)가 생을 끝마치기까지 몇 시간 동안 그의 머리 안에서 벌어진 의식과 기억의 지류를 좇는다. 세기말의 데카당스와 흥분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1900년. 화려한 장식미와 관능으로 아카데미의 인습에 저항한 클림트의 그림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열렬한 환호와 찬사를 받지만, 고국 오스트리아는 그를 천박한 장식주의자로 매도하며 ‘퇴폐주의에 죽음을’ 외친다.
상심한 클림트는 만국박람회 파티에서 소개받은 여배우 레아(새프론 버로우즈)에게서 새로운 영감과 터질 듯한 에로스를 느낀다. 하지만 레아는 진짜 레아가 따로 있다며 사라져 버리고, 클림트는 진짜 레아와 가짜 레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환영에 시달린다. 나부끼는 금박처럼 파편화된 이야기는 서사를 휘발시켜 버리지만, 영화는 무중력 우주공간을 유영하듯 클림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진짜와 가짜, 실재와 가상이라는 예술적 물음을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클림트’는 존 말코비치의, 존 말코비치를 위한, 존 말코비치에 의한 영화다. 출렁이듯 나른한 말코비치의 낮은 목소리는 여인과의 쾌락이 없이는 예술세계를 지탱할 수 없었던 클림트의 몽환적 관능주의를 그대로 재현해낸다. 공교롭게도 클림트의 대표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년)이 최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회화 사상 가장 비싼 1억3,500만 달러에 팔렸다. 마치 영화 개봉과 짜맞춘 듯이. 29일 개봉. 18세.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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